[제국과 인간]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

[김갑수 역사팩션 136] '열두 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16 11:12수정 2008.10.1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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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정부도 일본만큼 기만적이지 않았다"

일본의 전황 보고는 첫 전투에서부터 부풀려지고 있었다.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했을 때, 그들이 노렸던 미국의 항공모함은 그곳에 단 한 척도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불구로 만들었다는 군함들, 이를테면 메릴랜드호를 비롯한 6척은 얼마 후 말짱히 수리되어 훗날 사이판· 유황도· 오키나와 등의 해전에 다시 출현했다.

일본의 항공기들이 미국의 중유저장탱크나 선박 수리 시설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의문스러운 일이었다. 이 두 곳이 온존했기에 미국은 신속하게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하와이의 중유저장탱크에는 당시 일본의 2년 생산량과 맞먹는 450만 배럴의 석유가 들어 있었다. 남의 나라 자원을 손쉽게 빼앗아 쓰기만 했던 탓이었을까? 그들은 자원의 중요성을 무지하리만치 간과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일본이 함정 몇 척과 비행기 몇 백 대를 더 파괴시키려고, 기습 공격한 뒤 한 시간이 지나서야 각서를 미 국무성에 제출한 것은 미국의 조야와 국민 전체를 순식간에 분노, 단결시켰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전투력보다 훨씬 중요한 정신력을 일본이 미국에게 만들어 준 꼴이 되고 만 것이었다.

일본의 군부는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면 국제 여론의 비난을 사 오히려 전쟁에 불리하다는 외무성 관리들의 건의를 묵살했다. 그들은 개전 20분 전에야 주미 일본 대사관에 각서를 암호화하여 보냈다.

여기에다 암호 해독에 서툰 대사관 직원의 지체까지 겹쳐 실제 공격 후 한 시간이 지나서야 각서가 미국에 전달된 것이었다. 진주만이 불바다임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에서 전달된 일본의 각서는 미국의 정치인들을 분격시켰다.

마지막으로 각서의 내용도 도저히 선전포고라고 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문구로 되어 있었다.


미일 국교를 조정하여 태평양의 평화를 유지, 진전시키려는 일본 정부의 희망은 마침내 사라졌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미국의 태도로 보아, 교섭을 계속 하더라도 타결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의 헐 국무상은 각서를 가지고 온 노무라 일본 대사에게 말했다.


"지구상의 어떤 정부도 일본 정부만큼 기만적이지는 않다. 공직 생활 50년에 이렇게 허위와 왜곡에 가득 차 있는 문서는 처음 본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가장 무모한 방법으로, 누워 있는 거인 미국의 발바닥을 찌르고 만 셈이었다. 개전 당시 미국의 국민총생산액은 1천1백억 달러로서 일본의 12배였다. 철강 생산량은 20배, 석탄은 10배, 전기와 알루미늄은 6배였다. 비행기는 5배, 자동차는 450배, 석유비축량은 14억 배럴로 무려 일본의 7백 배였다.

태평양전쟁은 약자가 강자에게 먼저 싸움을 건 역사적으로 아주 희귀한 예가 되는 전쟁이었다.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삼국동맹을 맺은 것은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달성한 세력 구도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일본은 독일의 전력을 과대평가했다. 게다가 그 멀리 있는 독일이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와 태평양에서 일본을 지원할 리가 없었다. 다시 말해 삼국동맹은 일본에게 아무런 실익을 주지 못하고 미국의 경계심만 잔뜩 부풀려 놓은 것이었다.

미국은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에 제동을 걸었으며, 일본의 인도차이나 침공에 석유 금수 조치로 대응했다. 당시 일본의 석유 비축량은 2년분에 미달하는 양밖에는 되지 못했으니, 일본의 상황이 심각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그 때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철수하고 중국에서의 이권을 대폭 양보했더라면 미국과의 절충이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다. 사실 미국은 한국과 중국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인의 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 만약 일본이 타협을 시도했더라면 일본의 타협안을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이렇게 되었을 경우 한국의 독립은 요원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강경한 일본 군부는 그 마지막 기회마저 놓쳐 버렸다.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인 형국

일본 천황은 나가노 오사미 군령부총장을 불러 캐물었다.

"왜 이다지도 급히 전장을 확장하려 하는지 내가 이해할 수 있도록 하라."
"현 비축량이 2년분이므로 전쟁이 일어날 경우 마땅한 석유 공급원이 없다면 1년 안에 석유가 바닥나 버립니다. 따라서 더 어려워지기 전에 행동에 나서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산이 있다는 것인가?"
"사실 잘 모릅니다. 하지만 달리 살 길이 없습니다."

"세속의 말로 너 죽고 나 죽자 아닌가?"

나가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천황이 어전회의를 소집하라고 일렀다. 어전회의에서 천황은 의도적으로 스기야마 통수부장에게 먼저 물었다.

"미국과 전쟁을 할 경우 육군은 언제까지 전쟁을 종료할 수 있는가?"

스기야마는 천황에게 밀리면 안 된다는 작심을 하고 나온 터였다. 그는 자신 있는 어조로 말했다.

"남양 방면에서 3개월 이내에 끝내려고 합니다."

천황은 그의 대답 자세가 적잖이 불경하다고 느꼈다.

"중일전쟁 때 군부는 1개월 내로 전쟁이 끝난다 했지만 4년이 지나도록 교착 상태에 있지 않은가? 스기야마, 그때 너는 육군대신이 아니었던가?"
"중국 대륙이 광대하여 지연되고 있을 뿐, 요충지는 거의 점령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천황은 스기야마의 옹색한 답변을 물고 늘어졌다.

"그렇다면 4년이 걸리고 있는 중국 대륙보다 더 넓은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어떻게 3개월 내에 끝낼 수 있다는 말인가?"

이를 보다 못한 나가노가 끼어들었다.

"일본은 지금 수술을 결정해야 하는 암 환자와 같은 처지입니다. 수술하지 않으면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죽기는 죽되, 수술하면 위험하더라도 소생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외교 교섭에 최선을 다해 보고 안 될 경우 과감히 수술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미 군부는 전쟁 불사를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요컨대 일본 군부는 굶어 죽으나 맞아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스기야마의 발언은 천황에게 군부의 공식 방침을 전달하는 수준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은 천황을 압박하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멋쩍어진 천황은 메이지 천황을 흉내 내는 어제(御製)를 낭송하고 대신들을 물렸다.

"사해가 모두 동포라고 생각되는 이 세상에 어찌 이리도 거센 풍파가 몰아친다는 말인가?"

사실은 천황이건 군부건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능력도 의사도 없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 국민의 절대적 다수가 전쟁을 갈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의 정치인과 군인들은 맹목적인 국민을 진정시키려는 용의도 능력도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달 10월 17일 고노에 내각이 사퇴하고 도조 히데끼 내각이 출발함으로써 일본의 군부 파시즘 체제는 확고히 자리 잡았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진주만 #천황 #스기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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