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13)

[우리 말에 마음쓰기 451] ‘거기 있었던 나무의 존재’, ‘강한 존재’ 다듬기

등록 2008.10.17 14:18수정 2008.10.1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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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거기 있었던 나무의 존재

 

.. 날마다 거기 있었던 나무의 존재를 못 느끼다가 어느 날 나무를 찬찬히 볼 수 있는 시간이 오니까 나무가 늘 거기 있었다는 것을 이제서야 알게 되는구나 .. <추파>(서갑숙, 디어북, 2003) 10쪽

 

‘날마다’와 ‘거기’라는 말이 반갑습니다. ‘찬찬히 볼’이라 말하니 더 반가워요. ‘항상(恒常)’이 아닌 ‘늘’이니 더더욱 반갑고, ‘이제서야’와 ‘알게 되는구나’라 쓴 대목도 고맙습니다.

 

글쓴이는 알맞게 쓰면 좋은 말을 알고 있습니다. 살뜰히 북돋우면 한결 나은 말을 알고 있습니다. 꾸밈없이 쓰는 말과 살가이 나눌 말을 알고 있어요. 그러나 한 가지, ‘존재’가 불쑥 튀어나옵니다.

 

 ┌ 거기 있었던 나무의 존재를

 │

 │→ 거기 있었던 나무를

 │→ 거기 나무가 있은 줄

 │→ 거기 우뚝 서 있던 나무를

 └ …

 

가만히 살피면, 이 자리에 ‘존재’가 불쑥 튀어나와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보기글에서도 잘 나타나지만, “거기 ‘있었던’ 나무의 ‘존재’”입니다. ‘있었던’이 나온 다음 막바로 ‘존재’가 나오면서 겹치기가 되었습니다. ‘있었던’ 한 마디면 넉넉한데, 군더더기로 ‘존재’를 넣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보기글 끝에 “나무가 늘 거기 있었다는”으로 적으면서, 글쓴이 스스로 ‘존재’를 넣을 까닭이 없었음을 보여줍니다.

 

 ┌ 거기 존재하고 있던 나무의 존재를 (x)

 └ 거기 존재하던 나무를 (x)

 

어쩌면, ‘있었던­’ 한 마디로는 느낌이 살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뒤에 ‘존재’라는 말을 붙여서 뜻을 살리거나 좀더 힘주어 말하고 싶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나무가 늘 거기 있었음을

 └ 거기에 언제나 있던 나무를

 

그래서 ‘늘’이나 ‘언제나’ 한 마디를 사이에 넣어서 뜻을 북돋워 봅니다. 또는 “나무는 언제나처럼 거기 있었음을”처럼 적어 봅니다. “예나 이제나 거기에 있었던 나무를”처럼 적어 보기도 합니다. 또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를 넣을 수 있고, “한결같은 모습으로”를 넣어도 되며, “한결같이 그대로”를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ㄴ.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

 

..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가 대립하는 갈등 구조에서는 대개 약한 쪽의 권리가 강화되는 것이 사회정의에 부합할 때가 많다 ..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하종강, 후마니타스, 2006) 215쪽

 

‘대립(對立)하는’은 ‘서로 맞서는’이나 ‘서로 부딪히는’으로 풀어냅니다. 이렇게 풀면 뒤따르는 말 ‘갈등 구조’도 함께 걸러낼 수 있겠네요. “서로 맞서는 곳에서는”쯤으로. ‘대개(大槪)’는 ‘거의’나 ‘으레’로 손봅니다. ‘부합(符合)할’은 ‘알맞을’이나 ‘들어맞을’로 손질하고, “강화(强化)되는 것이”는 “높일 때가”로 손질해 줍니다.

 

 ┌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 (x)

 └ 약한 쪽 (o)

 

보기글을 보면 앞에서는 “약한 존재”라 했으나 뒤에서는 “약한 쪽”이라고 합니다. 둘은 같은 사람들을 가리키겠지요? 그러면 앞에 나오는 말을 “강한 쪽과 약한 쪽”으로 고쳐 놓아도 뜻을 헤아리는 데에는 다른 어려움이 없습니다.

 

 ┌ 강한 존재와 약한 존재

 │

 │→ 강한 쪽과 약한 쪽

 │→ 힘있는 쪽과 힘없는 쪽

 │→ 힘센 쪽과 여린 쪽

 └ …

 

자기가 쓴 글이라지만 이렇게 앞뒤에 어긋나게 쓰이는 줄 몰랐구나 싶습니다. 어떤 줄거리를 들려주어야 하느냐에는 마음을 기울이지만, 들려주고픈 줄거리를 어떤 말그릇에 담아야 하느냐는 제대로 살피지 못하니 이와 같은 어긋남이 나타난다고 느낍니다. 생각이 있으나 생각이 깊이 파고들지 못했고, 생각을 품으나 생각을 널리 펼치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마, 이렇게 글 한 줄 앞뒤에 ‘존재’라는 낱말과 ‘존재라는 낱말로 가리키려는 사람’을 함께 쓰는 분들이 적잖이 있을 테지요. 한쪽에서는 ‘존재’를 넣고, 바로 잇따르는 자리에는 ‘존재 아닌 낱말’을 넣는 분들 또한 적잖이 있을 테고요.

 

차근차근 우리 말을 살펴보면, 곰곰이 우리 글을 되뇌이면, 잠깐이나마 바쁜 일손을 거두고 자기 말씨와 말투를 돌아보아 주면 좋겠습니다. 바빠맞은 사람치고 말과 글을 알뜰살뜰 다독이는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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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17 14:18ⓒ 2008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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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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