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일러복 여고생, 조폭 두목이 되다!

[신간] 아카가와 지로 <세일러복과 기관총>

등록 2009.02.05 11:22수정 2009.02.05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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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러복과 기관총> 겉표지 ⓒ 이레

조폭을 다루는 이야기는 많다. 그 중에는 잔인한 폭력과 집단 난투극으로 얼룩진 작품도 있을테고, 황당한 설정을 바탕으로 코믹하게 이끌어가는 조폭 코미디물도 있을 것이다.

또 일부는 미스터리의 기법을 도입해서 사건을 풀어가는 재미를 던져주는 이야기도 있을 수 있다. 만일 이 세가지가 적절히 뒤섞인다면 어떨까.


어설프게 물에 물탄 듯이 섞인 것이 아니라, 탄탄한 구성과 생생한 인물묘사가 뒷받침된다면 재미있는 한편의 소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작가 아카가와 지로의 <세일러복과 기관총>이 바로 그런 소설이다. 제목과 책표지에서 연상되는 것 처럼 이 작품은 세일러복을 입은 여고생이 주인공이다. 17세의 여고생이 어느날 갑자기 조폭의 두목이 된다는 기발한(?) 상황으로부터 시작한다.

그 조폭의 이름은 '송사리파', 조직원은 두목까지 합쳐서 5명이 고작이다. 이들이 처음부터 이렇게 형편없는 조직은 아니었다. 한때는 수백 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었다. 송사리파의 우두머리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 손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어려운 사람들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다른 조직이 곤경에 빠지면 제일 먼저 도움을 주는 바람에 재정상태도 점점 악화되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까 조직원들은 하나둘씩 떠나고 남은 것은 오로지 몇명 안되는 조직원과 전화기도 한대 없는 초라한 사무실이다.

작지만 자부심이 있는 조직, 송사리파


그렇더라도 이들은 긍지를 가지고 있다. 대낮부터 거들먹거리며 사람들을 괴롭히고 다니는 어중이떠중이 야쿠자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는 점이다. 재정상태가 어찌되었건 송사리파는 썩어도 준치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이 조직의 우두머리가 죽으면서 시작된다. 우두머리는 자신의 혈육에게 조직을 넘긴다는 유언을 남겼고, 여지껏 일편단심으로 충성해왔던 조직원들은 그 유언을 글자그대로 절대적인 것으로 따르고 있다. 두목이 남긴 가족을 찾아서 헤매던 조직원들은 결국 조카딸인 17세의 여고생 호시 이즈미를 찾아내고, 그녀에게 충성의 맹세를 하기에 이른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유쾌하고 재미있는 상황의 설정이다. 물론 그 뒤의 사건이 그렇게 가볍게 흘러가지는 않는다. 이즈미가 처한 환경도 마음 편한 것이 아니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은 이즈미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그 아버지도 공항에서의 사고로 얼마전 목숨을 잃었다.

친구이자 스승인 아버지를 잃고 고아가 되었으니 그 상실감이 어느 정도일까. 그런데 난데없이 조직원들이 찾아와서 두목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다. 난처한 일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조직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 누군가가 기관총 세례를 퍼붓는가 하면, 처음보는 형사가 찾아와서 아버지의 죽음에는 미심쩍은 배경이 있다며 이것저것 질문을 한다.

혼자살고 있는 쓸쓸하지만 조용한 집에 생면부지의 여자가 찾아와서 동거를 요구하고, 얼마후에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 17세의 여고생이 감당하기에는 무리인 일들이 연달아 터지는 것이다. 이즈미는 이 어려운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까.

조직의 보스로 성장하는 여고생

이즈미도 만만한 인물은 아니다. 작은 키에 균형잡힌 몸매를 가졌고, 굳게 다문 입술과 커다란 눈에는 강한 의지가 담겨있다. 학교에서도 남학생과 여학생 모두에게 인기가 많다. 이즈미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학생들과 조직원들을 지휘하면서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조금씩 물리쳐 가지만 쉽지 않다.

일본 야쿠자의 잔인한 폭력과 고문을 목격하고, 자신도 여러차례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 장난처럼 시작된 조폭 생활은 어느덧 언제 생매장될지 모르는 전투로 변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조직들 사이의 싸움은 영화의 한장면을 연상시킨다. 나풀거리는 세일러복처럼 가볍게 시작된 이야기는 마치 기관총의 무게만큼 묵직해져간다.

작가 아카가와 지로는 무거운 이야기 속에서도 유머감각을 잃지않는다. 이즈미를 추종하는 남학생들은 소년같은 생기발랄함으로 작품속에 활력을 불어넣고, 때때로 예상치 못한 실수를 하면서 읽는 독자에게 긴장을 늦추지 않게 만든다. 진지한 사건과 밝은 캐릭터를 뒤섞는 일본 작가 특유의 기법이 이 작품에서도 동원되고 있다.

상황 설정도 그렇지만 여러 개의 사건과 인물들이 맞물리면서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 전개가 더욱 흥미롭다. 의외의 인물이 범인으로 밝혀지는 현대식 미스터리 소설의 구조에 익숙한 독자라면, 절반이 지나면서 범인의 정체를 조심스럽게 짐작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이 소설이 작가의 1981년 작품이라는 점이다.

덧붙이는 글 | <세일러복과 기관총> 아카가와 지로 지음 / 이선희 옮김. 이레 펴냄.


덧붙이는 글 <세일러복과 기관총> 아카가와 지로 지음 / 이선희 옮김. 이레 펴냄.

세일러복과 기관총

아카자와 지로 지음, 이선희 옮김,
이레, 2009


#세일러복과 기관총 #아카가와 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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