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24) 통로(線)

[우리 말에 마음쓰기 570] ‘내 생각-나라는 생각-옳은 생각’과 ‘제 생각(自己主體)’

등록 2009.03.05 09:15수정 2009.03.05 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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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통로(線)

 

.. 서로의 통로(線)를 갖고 막힘 없이 통하며 역사와 자연을 운영한다 ..  《김재준-죽음으로 산다》(사상사,1975) 37쪽

 

 '운영(運營)한다'는 '다스린다'로 다듬고, '통(通)하며'는'이어지다'로 다듬습니다.

 

 ┌ 통로(通路)

 │  (1) 통하여 다니는 길

 │   - 통로가 막히다 / 통로로 빠져나가다

 │  (2) 의사소통이나 거래 따위가 이루어지는 길

 │   - 진실한 대화는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가 된다 /

 │     그녀는 그 남자와의 결혼을 자신의 신분 상승 통로로 삼았다

 │

 ├ 서로의 통로(線)를 갖고

 │→ 서로 길을 트고

 │→ 서로 길을 뚫고

 │→ 서로 길을 열고

 └ …

 

 보기글을 통째로 손질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서로 문을 열고 막힘 없이 이어지면서"나 "서로 길을 트고 막힘 없이 오가면서"처럼. 또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막힘 없이 만나며"나 "서로 하나되어 막힘 없이 사귀며"처럼.

 

 ┌ 통로가 막히다 → 길이 막히다

 └ 마음을 이어주는 통로 → 마음을 이어주는 길

 

 그런데 이 보기글을 보면, 한자말 '통로' 뒤에 묶음표를 치고 '線'이라는 한자를 한 마디 넣습니다. 한자를 넣자면 '通路'를 넣었음직한데, '線'을 넣어 좀 엉뚱하지 않느냐 싶기도 합니다.

 

 어쩌면, 글쓴이는 '통로'라는 한자말로는 '길'을 이야기하고, '線'이라는 한자로는 '금'이나 '줄'을 이야기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서로 '길'을 뚫고 스스럼없이 만나는 가운데, 서로 마음과 마음은 '한 가닥 금이나 줄'로 이어져야 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담았는지 모릅니다.

 

 ┌ 서로 길을 트고 줄을 이어

 ├ 서로 길을 내고 줄을 엮어

 ├ 서로 길을 뚫고 줄을 묶어

 └ …

 

 한 가지 뜻만 밝히려 한 글이었으면 '線'을 덜고 '길'로 고쳐씁니다. 두 가지 뜻을 밝히려 한 글이었으면 두 가지 낱말을 함께 보여줍니다.

 

 생각해 보면, '길'이라는 낱말을 넣거나 '줄'이라는 낱말을 넣거나, 이러한 낱말에는 한 가지 뜻만 담긴다기보다 여러 가지 뜻과 느낌이 아울러 담기면서 나누게 되지 않느냐 싶습니다. 바라보기 나름이고 읽기 나름이니까요.

 

 길이란 오가는 자리이면서 열린 자리이고 트인 자리입니다. 줄이란 이어진 자리이면서 오가는 자리이고 끊이지 않는 자리, 곧 한결같은 자리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ㄴ. 제 생각(自己主體)

 

.. 죽음을 앞에 놓고 이를 뿌리치는 온몸의 몸부림이 있고서야 비로소 역사적 존재로서의 제 생각(自己主體), 곧 민중적 또는 민족적 주체성을 갖는 것이니 ..  《백기완-거듭 깨어나서》(아침,1984) 151쪽

 

 "온몸의 몸부림이 있고서야"는 "온몸으로 몸부림을 치고서야"로 다듬습니다. "역사적 존재(存在)로서의"는 "역사를 살아간다는"으로 다듬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민중적 또는 민족적 주체성을 갖는"은 "민중이나 민족이라는 주체성을 세우는"으로 손질해 봅니다. 또는, "이 나라 사람이요 이 겨레라는 생각"으로 손질합니다.

 

 ┌ 제 생각

 │

 ├ 제 생각(自己主體)

 ├ 자기 주체

 └ 자기 주체(自己主體)

 

 "제 생각"이면, 제 생각입니다. 남 생각이면 "남 생각"일 테지요. 이렇게 있는 그대로 쓰면 됩니다. 이런 말 한 마디로 넉넉합니다. 다른 군말을 붙일 까닭이 없고, 군말이 들러붙을 구석이 없습니다.

 

 "제 생각"이라고 적은 뒤에 '자기 주체'라는 말을 한글로도 아닌 한자로 '自己主體'로 적는다고 해서 한결 잘 알아들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처음부터 '자기 주체'로 적었다면, 또는 한자로 '自己主體'로 적었다면 글쓴이 뜻과 생각이 잘 건네어지게 되었을가 궁금합니다.

 

 ┌ 역사를 살아가는 내 생각

 ├ 역사에 살아 있다는 내 생각

 ├ 역사에 우뚝 서 있는 나라는 생각

 ├ 역사에 우뚝 서 있는 올바른 생각

 ├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나라는 생각

 ├ 역사를 일구어 가는 나라는 생각

 └ …

 

 그렇지만 이 보기글은 백기완 님이 아주 예전에 쓴 글입니다. 오늘날에는 이와 같은 글은 쓰시지 않습니다. 백기완 님이 당신 옛글을 보셨다면 '아, 나도 예전에는 저런 못난 글을 썼지' 하고 부끄러워하면서 새롭게 고쳐쓰시리라 믿습니다. 얼토당토않거나 얄딱구리한 대목은 남김없이 털어내면서. 아쉽거나 안타깝게 느껴지는 구석은 속속들이 덜어내면서.

 

 그리고 젊은 우리들한테 한 말씀을 남기시지 않으랴 싶습니다. 늙은 당신이 그 나이에도 당신 말과 생각과 삶을 꾸준하게 가다듬으면서 늘 새로워지도록 힘쓰고 있으니, 젊은 우리들 또한 바지런히 땀흘리면서 우리 모습을 고스란히 느끼고 되새기고 곱씹으면서 언제까지나 젊음을 젊음 그대로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라고. 말을 가꾸는 사람은 생각을 가꾸는 사람이고, 생각을 가꾸는 사람은 삶을 가꾸는 사람이라, 이러한 사람으로 우뚝 설 때 비로소 우리 세상을 올바르고 아름답게 고쳐 나갈 수 있다고.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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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05 09:15ⓒ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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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묶음표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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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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