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11) 그녀 4

[우리 말에 마음쓰기 585] 얄궂은 ‘그녀’ 타령 덜어내기, ‘그녀’ 안 쓴 자리

등록 2009.03.21 12:11수정 2009.03.2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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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그녀 → 앨리스

 

.. 앨리스는 우리 집에 자주 들렀으며 우리 아이들과 굉장히 친해졌다. 그녀의 글쓰기는 계속해서 나를 경탄게 했다 ..  《하워드 진/유강은 옮김-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이후,2002) 65쪽

 

 "굉장(宏壯)히 친(親)해졌다"는 "무척 가까워졌다"로 손봅니다. '계속(繼續)해서'는 '잇달아'나 '자꾸자꾸'나 '언제나'로 다듬고, '경탄(敬歎)케'는 '놀라게'로 다듬어 줍니다.

 

 ┌ 그녀의 글쓰기는 나를 경탄게 했다

 │

 │→ 앨리스가 보여주는 글쓰기는 나를 놀라게 했다

 │→ 앨리스가 쓴 글은 나를 놀라게 했다

 │→ 앨리스는 나를 놀라게 하는 글을 썼다

 └ …

 

 사람이름으로 써야 알맞는 자리입니다. 사람이름을 안 쓰니 토씨 '-의'까지 들러붙습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름을 썼어도 "앨리스의 글쓰기"처럼 썼을는지 모릅니다. 또한 '그녀'라는 말을 썼어도 "그녀가 쓴 글은 나를 놀라게 했다"처럼 적으면서, 말투 하나는 얄궂어도, 다른 말투는 알맞고 깨끗하게 썼을는지 모릅니다.

 

 찬찬히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말투를 가다듬는다고 할 때에는, '가장 크게 골칫거리가 되는' 대목 하나만 올바르게 추슬러서는 모자라다고. 우리가 품은 생각과 뜻을 '나타내는 길'을 통째로 살필 수 있어야겠다고. 낱말 하나나 말투 하나를 차근차근 돌아보며 글매무새를 다스려야 하는 가운데, 낱말과 말투로 엮어 나가는 글을 두루 돌아볼 수 있어야겠다고. '그녀' 하나만 잘못 쓰는 사람은 없으며, 토씨 '-의' 하나만 얄궂게 쓰는 사람 없고, 어렵고 딱딱한 일제강점기 한자말에만 얽매인 사람 없다고.

 

 

ㄴ. 그녀 → 한국 여학생

 

.. 중ㆍ일 전쟁 무렵, 나는 하얼빈에서 꽤 많은 한국 여학생들과 함께 여학교를 다녔다. 그때 그녀들은 식민지 정책 때문에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이응노ㆍ박인경ㆍ도미야마/이원혜 옮김-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삼성미술문화재단,1994) 5쪽

 

 일본책에는 틀림없이 '彼女'로 적었을 테지요. 이렇게 적힌 글을 한국말로 옮기는 분은 딱히 더 생각하지 않고 '그녀'로 적었을 테고요. 세상사람들이 두루 '그녀'라는 말을 쓰는 오늘날이기 때문에, 번역하는 사람이든 창작하는 사람이든 '그녀'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씁니다. 아니, 문학맛을 한껏 살려 주는 말이라고 느끼며 일부러 더 자주 쓰기도 합니다.

 

 ┌ 꽤 많은 한국 여학생들과 함께 (o)

 │

 ├ 그녀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x)

 │→ 그 여학생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그 학생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한국 학생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

 

 보기글에서는 '한국 여학생'으로 적어야 알맞습니다. 앞에서 '한국 여학생'으로 적은 말이 길다고 느껴지면 '여학생'이라고 하면 됩니다. '여-'라는 말을 덜고 '학생'으로 써도 됩니다. '한국 학생'으로 적어 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그렇지만 이처럼 안 쓰는 우리들입니다. "그 한국 여학생"이나 "그 한국 학생"이나 "그 학생" 가운데 하나로 쓰면 되는데, 이렇게 쓰는 사람 보기가 아주 어렵습니다. 이도 저도 아닌 '그녀'뿐입니다. 이 낱말 하나면 어디에서든 다 말이 되고 술술 이어진다고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한국 남학생"을 이야기하는 자리였다면 "그들은"으로 쓸까요? 그럴 테지요. 아무렴. 그러면 남학생과 여학생은 어떻게 다를까요. 둘 모두 똑같은 '사람'이 아닐는지요. 우리 말 문화와 역사를 살피면, 남자라고 해서, 또 여자라고 해서 따로 나누어서 가리키지 않았습니다. 둘을 똑같이 가리킬 뿐입니다. "그 남학생"과 "그 여학생"으로 가리키기도 하지만, 딱히 남자와 여자임을 밝히지 않아도 되는 자리라면(보기글처럼) "그 학생들"이라고만 했어요.

 

 '여교사-여직원-여기사-여사장' 같은 말이 남자와 여자를 갈라놓고 푸대접하는 말이라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사람 가운데 어느 누구도 '그녀'를 '사람을 가리키는 자리'에서 따로 뚝 떼어놓고 써도 무어라 토를 달지 않습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교사-직원-기사-사장'이잖아요. 남자이든 여자이든, 대이름씨로 가리키는 자리에는 똑같이 '그' 하나일 뿐이에요. 보기글에서는 학생이 남자이든 여자이든 똑같이 '학생'일 뿐이고요.

 

 ┌ 그때 그 사람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그때 그 동무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그때 그들은 성과 이름마저 바뀐 채

 └ …

 

 말에는 우리들 생각과 삶과 문화를 고이 담습니다. 오늘날처럼 '그녀' 말씀씀이가 부쩍 늘기만 하고 줄거나 사라지지 않는 까닭 가운데 하나는, 남녀평등을 외치면서도 정작 남녀평등보다는 남녀'안'평등으로 자리잡기를 바라는 마음이 깊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입으로 외치는 평등은 넘치나, 정작 몸으로 부대끼는 평등은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 아니랴 싶습니다. 말과 생각은 진보라 하지만, 몸과 삶은 진보가 아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서로를 똑같은 '사람'으로 느끼거나 생각한다면, '그녀' 말씀씀이도 쫓아낼 일입니다. 서로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느끼거나 받아들인다면, '그녀'가 아닌 '사람'을 찾고 '동무'를 찾고 '그'를 찾을 노릇입니다. 이 말투 '그녀'가 일제강점기 찌꺼기 말투임을 떠나서도 말입니다.

 

 

ㄷ. '그녀'를 안 쓴 자리

 

.. 대학내일 배포대 주변을 정돈하는 항정순 씨는 "청소하면서 가끔 펼쳐 본다"며 대학내일을 집어들었다. 호기심 때문에 보기 시작한 대학내일에 대해 그는 "학생들이 식당에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이걸 집어드는 거야.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었지. 그래서 나도 보게 됐지." ..  잡지 《대학매일》(내일신문) 345호 74쪽

 

 "주변(周邊)을 정돈(整頓)하는"는 "둘레를 치우는"으로 다듬을 수 있습니다. "보기 시작(始作)한"은 "보게 된"으로 손질합니다.

 

 ┌ 항정순 씨는

 └ 호기심 때문에 보기 시작한 그는

 

 책을 보고 사람들 말을 들으면, 어디에서나 들려오는 '그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안 듣고 살 수는 없나 싶었는데, 이 보기글에는 '그녀'가 없습니다. '그'라는 말만 나옵니다. 이런 자리에도 으레 "호기심 때문에 보기 시작한 그녀는"처럼 쓰기 일쑤일 텐데, 뜻밖에도 말을 잘 가려서 썼습니다. 반갑군요. 고맙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그녀' 아닌 '그'를 잘 썼음을 알아채거나 느끼는 분은 얼마나 될까요.

 

 한 가지 덧붙이면 '그녀' 아닌 '그'를 써야 올바르지만, 이보다 '항정순 씨는'이라고 해서 사람이름을 그대로 살려서 쓴다면 한결 낫습니다. 또는 아예 아무런 임자말을 안 넣어도 됩니다. 이렇게 한다면 "호기심 때문에 보기 된 대학내일을 놓고, ∼ 하고 말했다"처럼 될 테지요.

 

 보기글을 하나 들어 보겠습니다. "소설쓰는 공선옥 씨는 이번에 새 작품을 내놓았다. 그는 이 작품을 놓고 ∼ 하고 덧붙였다."처럼 써도 나쁘지 않으나, "소설쓰는 공선옥 씨는 이번에 새 작품을 내놓았다. 공선옥 씨는 이 작품을 놓고 ∼ 하고 덧붙였다."처럼 쓰면 한결 낫고, "소설가 공선옥 씨는 이번에 새 작품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작품을 놓고 ∼ 하고 덧붙였다."처럼 하면 더욱 낫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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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1 12:11ⓒ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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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말익히기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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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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