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273)

― '깨끗한 상태의 카드', '반실업 상태의 사람들' 다듬기

등록 2009.03.29 20:09수정 2009.03.29 20:09
0
원고료로 응원

 

ㄱ. 깨끗한 상태의 카드

 

.. 매번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깨끗한 상태의 카드로 만들 수 있다 ..  《조나단 콕스/김문호 옮김-뛰어난 사진을 위한 접사의 모든 것》(청어람미디어,2008) 59쪽

 

 '매번(每番)'은 '늘'이나 '언제나'로 손봅니다. "새롭게 시작(始作)할"은 "새롭게 쓸"이나 "새롭게 찍을"로 다듬습니다.

 

 ┌ 깨끗한 상태의 카드

 │

 │→ 깨끗한 카드

 │→ 깨끗이 비워진 카드

 │→ 깨끗하게 비운 카드

 └ …

 

 술잔을 비우고 마음자리를 비우고 주머니를 비웁니다. 서랍을 비우고 자리를 비우고 머리를 비웁니다. 알맞는 만큼 차지할 수 있도록, 넘치지 않으면서 알맞춤하게 이어갈 수 있도록 매무새를 추스릅니다.

 

 술잔을 비우면서 몸과 마음 한귀퉁이에 도사리고 있던 모든 찌끄레기를 털어냅니다. 마음자리를 비우면서 자칫 고이거나 매이거나 움츠러들 수 있던 어설픈 매무새를 털어냅니다. 주머니를 비우면서 더 가난하게 꾸리는 살림이 아니라, 나한테 지나치게 있었을는지 모를 돈을 둘레 이웃과 오붓하게 나누도록 털어냅니다.

 

 ┌ 깨끗하게 지우기

 └ 깨끗하게 비우기

 

 디지털사진을 담는 저장장치를 틈틈이 비워 놓습니다. 그동안 찍은 사진은 잘 갈무리한 다음, 새로 찍는 사진을 차곡차곡 채울 수 있도록 비워 놓습니다. 이렇게 비워야 다음에 새로운 사진 새로운 모습 새로운 이야기를 하나둘 채울 수 있습니다.

 

 텅 빈 디지털사진 저장장치를 새로운 이야기 깃든 사진으로 채우려고 골목마실을 나갑니다. 신나게 사진을 찍고 어둑어둑 떨어지는 해를 보면서 집으로 돌아옵니다. 동네 구멍가게에 들러 보리술 한 병을 삽니다. 주머니에 챙기고 있던 장바구니를 꺼내어 담습니다. 콧노래까지는 아니나 혼자말처럼 노래 몇 마디 중얼중얼 부르면서 걷습니다. 오늘 하루 뿌듯하게 느껴지는 모습을 여러 장 찍었기 때문입니다.

 

 밥을 끓이고 책을 펼치고 보일러를 돌려 빨래를 합니다. 내 삶 어느 자리이든 늘 비우고 다시 채우고 거듭 비우며 새로 채우는 흐름을 이을 수 있을 때 언제나 홀가분하면서 즐거움이 넘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글 한 줄을 쓰건 말 한 마디를 나누건, 아기를 안고 어르건 아기 손을 잡고 걷기 놀이를 하건, 언제나 어제 일을 잊고 오늘 일을 생각하면서 바로 이 자리에서 웃을 수 있을 때 비로소 웃음이라고 느낍니다.

 

 ┌ 깨끗하게 비워진 카드로 만들 수 있다

 ├ 깨끗해진 카드로 만들 수 있다

 ├ 깨끗해진 카드로 만들어 쓸 수 있다

 └ …

 

 스스로 먼저 가벼운 마음일 때 가볍게 사진기를 들고 펜을 들고 자판을 두들기며 책장을 넘기게 됨을 느낍니다. 스스로 먼저 가벼운 마음이 되지 못할 때 자꾸자꾸 어렵거나 따분한 글이 이어지면서, 멋부리거나 치레하거나 꾸미는 글만 쏟아낸다고 느낍니다.

 

 가벼운 마음일 때 맑고 싱그러운 글입니다. 가볍지 못한 마음일 때 지저분하고 고리타분한 글입니다. 가벼운 마음일 때 아름다움과 즐거움이 담기는 말입니다. 가볍지 못한 마음일 때 주눅들고 꾀죄죄하게 되는 말입니다.

 

 

ㄴ. 반실업 상태의 사람들

 

.. 그런데 건설 노가다라면 1년 중 3분의 2는 논다고 할 수 있는 반실업 상태의 사람들이 대부분이에요 ..  《민족문학작가회의 여성문학분과위원회 엮음-여성운동과 문학 (1)》(실천문학사,1988) 18쪽

 

 일본말 '노가다(土方)'는 '막일'로 고쳐야 하지만, 이런 말투는 우리 삶에 깊숙하게 틀어박혔을 뿐 아니라, 이런 말투가 아니고는 제대로 뜻을 담아낼 수 없는 듯 여기고 있습니다. "1년(一年) 중(中)"은 "한 해 가운데"로 손보고, '대부분(大部分)이에요'는 '거의 모두예요'로 손봅니다.

 

 ┌ 반실업 상태의 사람들

 │

 │→ 반쯤은 노는 사람들

 │→ 반쯤 일자리 없는 사람

 │→ 반만 일하는 사람들

 └ …

 

 반쯤은 일자리가 있으나 반쯤은 일자리가 없음을 가리키는 '반실업(半失業)'입니다. '반실업'과 맞서는 낱말이라면 '반취직'이 될까요? 이런 낱말을 쓰려 한다면 얼마든지 쓸 수 있을 테지만, "반쯤 일이 없다"나 "반쯤 일이 있다"라 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반쯤 논다"나 "반쯤 일한다"라 하면 어떨는지요. "반은 일하고 반은 논다"라 하거나 "반은 일감이 있고 반은 일감이 없다"고 하면 어떠할까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놓아 버리고 대충 쓰는 우리 말이 아닌, 어쩔 수 없지 않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단단히 붙잡으며 하나하나 손질하고 찬찬히 갈무리하는 우리 말이 되도록 애쓰면 좋겠습니다. 이냥저냥 흘러가는 대로 아무렇게나 쓰는 우리 글이 아닌, 올바르고 싱그럽게 흘러갈 우리 글이 되도록 온 넋과 얼을 들여 가다듬고 일으켜세우게끔 힘쓰면 좋겠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2009.03.29 20:09ⓒ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작은자전거 : 인천+부천+수원 자전거 사랑이] http://cafe.naver.com/inbusu
#토씨 ‘-의’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AD

AD

AD

인기기사

  1. 1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집 정리 중 저금통 발견, 액수에 놀랐습니다
  2. 2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국무총리도 감히 이름을 못 부르는 윤 정권의 2인자
  3. 3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과음으로 독일 국민에게 못 볼 꼴... 이번엔 혼돈의 도가니
  4. 4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저는 경상도 사람들이 참 부럽습니다, 왜냐면
  5. 5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국방부의 놀라운 배짱... 지난 1월에 그들이 벌인 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