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개신교는 어떻게 배타적 권력을 형성했을까

한국에서 불교와 기독교는 화해불가능하다 ⑤

등록 2009.05.25 10:41수정 2009.05.2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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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정권과 미국을 배경으로 급속하게 성장한 한국교회

한국 개신교는 어떤 종교보다 빠르게 성장하면서 순조롭게 주류종교로 자리잡았다. 유구한 역사를 가졌음에도 조선을 거치면서 철저하게 억압받은 불교나 전래과정에서 많은 희생자를 낸 천주교에 비해서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해방이후 90년대 이르기까지 양적성장을 해온 개신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 이후에는 정치·사회적으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개신교가 득세하게 된 것은 잘 알려진 것처럼 미국의 영향 때문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후 미국은 남한에서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절대적인 위치에 있었다. 1953년 한미방위조약으로 한국군의 지휘권은 미국이 행사했고 막대한 원조물자는 피폐한 한국경제의 버팀목 역할을 했다. 또한 팝송과 할리우드 영화는 대중음악과 극장가를 장악하면서 미국문화유입의 첨병역할을 했고 미국 선교사들도 원조물자의 창구역할을 하면서 장로교·감리교 등 개신교 주류교단의 상층을 장악했다.

이처럼 팍스아메리카 체제에 철저하게 귀속된 남한에서 개신교는 백만 미만의 소수종파였음에도 미국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권력의 핵심세력을 형성했다. 개신교 장로인 이승만 체제 12년간 이기붕 부통령 등 135명의 장관급인사의 절반을 개신교 인사가 차지했으며 그 중 백낙준(문교부장관), 임영신(상공부장관), 김활란(공보처장관) 등 미국 유학파들의 진출은 더욱 확대되었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이승만 정권을 기독교 정권으로 간주하고 노골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절정은 이승만·이기붕이 정·부통령으로 출마한 1960년 대통령 선거였다. 이 당시 개신교 지도자들은 민주당 부통령 후보였던 장면이 천주교 신자인 것을 이용해 "기독교는 공산주의와 싸우는 것은 물론 가톨릭과도 싸워 이겨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 2003.6.10, 한길사 참조)

그러나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막을 내리면서 개신교는 부정부패집단으로 몰려 제2공화국 때는 정치·사회적으로 영향력을 상실하기도 했으나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독재정권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면서 기사회생했다. 1992년 대선 때는 개신교 장로인 민자당 김영삼 후보를 지원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장로대통령 만들기에 나서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정권은 IMF 구제금융을 초래하는 등 국가를 도탄에 빠뜨리면서 실패로 마감했고 그 영향으로 1997년 거의 40년 만에 야당으로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정권교체 후 개신교 주류세력은 70~80년대 개신교 진보세력의 반정부투쟁을 정교분리에 어긋난다며 강하게 비난했음에도 일언반구 해명도 없이 김대중-노무현 정부을 친북용공세력으로 간주하고 중요한 사안마다 대규모 집회를 개최하며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다.  


특히 2005년 개정된 사학법을 무효화시키기 위해 한나라당과 연대해 개방형 이사제 완화 등을 주장하며 이사파견 거부와 학교 폐쇄는 물론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에서 사학법 개정을 반대하는 후보들을 심판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이는 미국의 카터 정부가 1978년 사립학교의 소득공제자격을 박탈하겠다고 하자 기독교우파 지도자 제리 폴웰 등이 개신교 계통학교와 근본주의자들을 선동해 민주당을 압박했던 것과 유사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파워 엘리트의 대다수 개신교-강남-미국 유학 경험자로 채워져


2007년 대선에서도 개신교 장로인 이명박 후보를 당선시키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한 개신교 세력은 이승만 시대를 능가할 정도로 정권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그 중에서도 이 대통령이 다닌 소망교회 인맥은 정권 출발과 동시에 전면에 나서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당시 소망교회 인맥으로는 이경숙 인수위원장, 박미석 청와대 사회정책수석을 비롯해 소금회 멤버(소망교회 금융인 선교회)들이었다. 소금회에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현 국가경쟁력위원장), 이우철 전 금감원 부원장(현 생명보험협회장),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의원을 비롯해 이종구·김광림 의원(한나라당) 등이 속해 있었다.

이 대통령이 소망교회 인맥을 중용한 이유는 그 자신이 30년 이상 소망교회에 다니면서 얻게 된 깊은 신앙심과 강만수 장관 등과 끈끈하게 맺어진 인맥관계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대건설 사장으로 근무할 당시, 소망교회 본당 건설에 도움을 준 바 있던 이 대통령은 자신의 성공비결은 소망교회에서 얻은 신앙심 때문이며 그 덕에 지병인 간염까지 나았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한 바 있다.

그러나 소망교회 인사들이 자질부족과 부동산 투기혐의 등으로 줄줄이 물러나면서 그들이 대통령과의 개인적 친분이 아닌 능력 본위로 임명됐다는 본래의 설명을 무색하게 했다. 이경숙 위원장은 '어륀지 파동'으로, 강만수 장관은 경제위기촉발 책임자로, 박미석 전 수석은 부동산 투기혐의로 물러나면서 이명박 정부의 지지율하락에 기여하기도 했다.

소망교회 외에 개신교 인사들의 진출도 두드러졌다. 한승수 총리를 포함해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 김도연 전 교육과학부 장관, 이윤호 지식경제부 장관, 김성이 전 보건복지부 장관, 정종환 국토해양부 장관, 변도윤 여성부 장관, 이상희 국방부 장관, 이만의 환경부 장관, 김하중 전 통일부 장관 등 전체 16명의 국무위원중 10명이 기독교신자였다. 반면 불교신자는 1명도 없었다. 특히 김성이 전 장관은 장관 재임 당시 '양극화는 신앙심이 부족한 탓'이라는 기고문으로 논란을 빚기도 했다.

현재는 강만수·김도연·김성이·김하중 장관이 교체되었지만 이상희·이윤호·정종환·변도윤·이만의 장관은 현직을 유지하고 있다. 여기에 장태평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안병만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개신교 신자로 알려지고 있다. 총리를 포함한 16명의 국무위원 중 7명이 개신교 신자로 초대 내각보다는 줄었지만 여전히 다수를 이루고 있다.(위클리경향  2009년 4월 7일자 제819호 참조)

한편 청와대 수석 8명 중 4명, 청와대 비서관 41명 중 16명의 종교도 개신교인 것으로 파악됐으며 국무위원을 포함한 고위급 인사의 대부분은 강남권에 거주하거나 부동산을 소유해 강부자 정권으로 불리기도 했다.

고위인사들의 유학경험도 흥미를 끌었다. 대선이후 이경숙 위원장을 비롯한 인수위원 24명과 청와대 수석 비서진 9명, 국무총리와 국무위원 15명 등 이명박 정권 '파워 엘리트' 49명 중 교수 출신이 전체의 34.6%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이들 중 전체의 65.3%가 해외유학 경험자였고 미국 학위취득자는 유학자의 75%에 달했다. (한겨레21, 2008년2월28일자 제699호 참조)

이를 통해 현재 한국사회 권력은 개신교-강남-미국유학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수의 파워엘리트들이 불교세가 강한 영남에 연고가 있음에도 개신교신자가 다수를 이루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 이후 권력의 중추를 이룬 영남출신 파워엘리트의 대다수가 미국유학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유학생(정규유학생, 기업·관료·군출신의 중·단기 연수생 포함)들은 미국유학을 통해 구한말 윤치호·서재필 같은 인물이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불교보다는 개신교를 가장 우월한 종교로 인식했고 미국 동포의 절대다수가 속해있는 교회공동체와 관계하면서 자연스럽게 개신교인이 되었다.

이들은 유학후 한국사회주류에 편입되면서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는 교회(강남형)에 출석해 강력한 종교적 이너서클을 형성했다. 강남형 교회들은 고위관료, 대기업 임원, 대학교수나 판·검사, 변호사, 의사, 유명 연예인 같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가 많고 자녀들의 대부분도 미국 유학을 다녀오거나 유학중이다. 이들에게 교회는 신앙의 장일 뿐 아니라  인맥과 혼맥을 형성하는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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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이명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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