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3일 방송분에 등장한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 비담(김남길분).
MBC
<선덕여왕>의 '비밀 병기'라고, 최근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예고되었던 새 얼굴이 3일 방영된 제21부에서 드디어 모습을 공개했다. 덕만-천명-유신 3인방 구도의 형성 이후 한동안 정체된 듯한 인상을 주던 이 드라마에 이른 바 '국면전환용'의 인물이 투입된 것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비담(김남길 분)이다.
비담의 등장은 시작부터 매우 독특했다. 아니 시건방졌다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덕만(이요원 분)과 유신(엄태웅 분)의 은신처에 갑작스레 출현한 비담은 배고픈 두 사람에게 닭다리 2개를 휙 던진 뒤 유신의 두건을 담보물로 잡아두고는 사라졌다.
'쉽게 양보하기 힘든' 닭다리를 하나도 아니고 두 개씩이나 그것도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얼른 떼어주는 것으로 보아, 심성이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 시청자들도 있을 것이다. 알고 보니, 그는 한동안 잠적했던, 아니 수십 년간 잠적했던 국선 문노(정호빈 분)의 제자였다.
그동안 어딘가에 꼭꼭 숨어 여타 등장인물들은 물론 시청자들의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켰던 문노가, 비담이라는 이 '건방진' 비밀병기와 함께 시골에 숨어 살았던 것이다. 문노의 제자임을 입증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비담은 제21부 말미에 화려한 무술 개인기를 과시했다. 의사로 변신한 문노 대신에 앞으로는 비담에게서 시원스러운 무술 실력을 감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선덕여왕> 제21부 끝 장면에서는 비담을 '미실과 진지왕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자막이 나왔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서 5월 25일의 제1부를 떠올려보자. 그때, 갓난아이를 안은 미실(고현정 분)이 진지왕(임호 분)에게 자신이 킹메이커임을 상기시키면서 "약속대로 저를 왕후로 만들어주십시오"라고 간청한 적이 있다.
진지왕이 자신의 요구를 거절하자, 미실은 "이제 너는 필요 없다"면서 강보에 싸인 아기를 땅바닥에 내려놓고는, 곧바로 진지왕 폐위 작업에 착수했다. 그때 미실이 버린 아기가 바로 비담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비담은 자신의 부모인 진지왕과 미실 양쪽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셈이다.
역사서에는 전혀 언급이 없는 '비담'의 개인신상 앞으로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덕만·천명·유신 등과 더불어 이야기의 한 축을 구성하게 될 비담. 그는 정말 5대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났을까? 역사 기록에서는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비담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3차례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사기> 권5 '선덕여왕 본기' 및 '진덕여왕 본기', 권41 '김유신 열전'에 비담이라는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위작 논란이 있는 필사본 <화랑세기> 제24세 풍월주 천광공 편에도 그의 이름이 1차례 나온다. <삼국사기>와 <화랑세기>를 합하면, 그의 이름은 도합 4차례 나온다.
그런데 위 4개의 기록은 모두 다 선덕여왕 16년(647)에 벌어진 비담의 쿠데타와 관련된 것들이다. 이들 자료에는 비담이 여왕 말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김유신 등에 의해 진압됐다는 내용만 나올 뿐, 그의 개인 신상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비담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누구였는지에 관한 역사기록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은 역사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또 진지왕과 미실 사이에서 비담 외의 자식이 태어났다는 기록도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진지왕과 미실이 비담을 낳았다거나 혹은 진지왕과 미실이 자식을 낳았음을 보여주는 직접적 자료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방법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밖에 없다. 그 다른 방법이란, 진지왕과 미실이 자식을 낳았을 '가능성'이 있는가를 추적하는 것이다.
재위 3년 동안 미실에 대한 사랑이 식어버린 진지왕2개의 왕비혈통 중 하나인 대원신통의 계승자인 미실은, <화랑세기> 제11세 풍월주 하종 편에 따르면, 제24대 진흥왕 재위기(534~576년) 때 진흥왕을 포함한 3대의 제왕을 모실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이에 따라 미실은 진흥왕·진지왕·진평왕 3대의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거기다가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 따르면, 진흥왕 사후에 미실은 왕후가 되는 조건으로 진지왕의 등극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사도태후(진흥왕의 부인)와 함께 국정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진흥왕 생전에도 진지왕과 미실이 육체적 관계를 가진 적은 있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정치적으로 가장 근접 거리에 있었던 시기는 진지왕 즉위부터 폐위까지의 3년간이었다.
그럼 그 3년 동안에 두 사람 사이에서 자식이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을까? 이에 관한 명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것을 판단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자료는 있다.
위의 <화랑세기> 세종 편에 따르면, 재위 3년 동안 미실에 대한 진지왕의 애정은 이미 식어버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진지왕의 관심을 사로잡은 또 다른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 편에서는 진지왕이 그 여자에게 깊이 빠져 있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왕후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진지왕이 이행하지 않는 데다가 그나마 다른 여자에게 푹 빠져버린 데에 분노해서 미실이 사도태후와 함께 진지왕 폐위에 나서게 되었다는 것이 <화랑세기>의 이야기다. 그렇게 해서 제26대 진평왕이 등극하게 되었다는 것이 역시 <화랑세기>의 설명이다.
자식이 있었다면, 미실이 진지왕을 폐위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