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난 미실의 얼굴 변화. 왼쪽의 두 사진은 제1부, 오른쪽의 두 사진은 제21부의 사진.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최근의 변화 중 하나는 실권자 미실(고현정 분)의 권세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이다. 아직까지는 미실 캠프가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요즘 들어 을제(신구 분)가 국정 장악력을 강화해 가는 등 진평왕 캠프의 위상이 날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정세변화를 나타내기라도 하듯이, 얼마 전 <TV리포트>라는 매체는 ''선덕여왕' 후덕 미실 VS 살빠진 미실'이란 기사를 내보냈다. 최근 들어 드라마상에서 미실의 얼굴에 변화가 나타났다는 것. 드라마 방영 초기 통통했던 얼굴과 달리, 최근 화면에 나타나는 미실의 얼굴은 상대적으로 야위었다.
등장인물의 외모가 바뀐 데에는 드라마 외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예전과 달리 야위어진 미실의 모습은 그의 권세가 시들고 있다는 인상을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덕만(이요원 분)의 공주 신분이 판명되어 미실 캠프에서 '덕만공주'라는 호칭이 나온 것과 때를 맞춘 이 같은 변화는, 덕만과 미실이 제로섬 관계라는 것, 다시 말해 한쪽이 잘 되면 다른 쪽은 잘못될 수밖에 없는 관계임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당장에는 덕만이 쫓기고 있지만 큰 흐름에서는 미실이 쫓기고 있다는 점, 즉 앞으로는 덕만의 위상이 미실의 위상을 넘어서게 될 것이라는 점을 더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에서 신라 중기의 걸출한 권력자 미실의 권세에 이상징후가 생기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일까? '정치적 의미'에서 미실의 '얼굴'이 야위기 시작한 것은 정확히 어느 시점부터일까?
만호태후 위상과 함께 서서히 약해진 미실미실의 권력이 절정에 들어서기 시작한 시점은, 제24대 진흥왕이 사망하고 제25대 진지왕이 즉위(576년)한 지 3년 만에 미실이 진지왕을 폐위하고 제26대 진평왕을 옹립한 579년이었다. 579년에 그의 권력이 절정에 진입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위작 논란이 있는 <화랑세기> 제11세 풍월주 하종 편 및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 있다.
576년의 상황과 관련하여 제11세 하종 편에서는, 진흥왕 사망 직후에 사도태후(진흥왕의 부인)가 주도하는 사도·미실·세종·미생 4인방이 진지왕을 옹립한 후에 사도태후가 국정의 중심에서 진지왕을 제어했다고 했다. 이에 비해 579년의 상황과 관련하여 제6세 세종 편에서는, 미실이 사도태후를 끌어들여 진지왕을 폐하고 진평왕을 옹립했다고 했다.
576년에는 사도태후가 주도하는 4인방이 진지왕을 옹립했고 579년에는 미실이 주도하는 미실-사도 투톱이 진평왕을 옹립했다고 했으므로, 576년에 비해 579년에 미실의 권세가 한층 더 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비 때마다 미실과 사도태후가 제휴할 수 있었던 것은 두 사람이 조카와 이모의 관계인 동시에, 2개의 왕비혈통 중 하나인 대원신통에 똑같이 소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579년부터 절정에 진입한 미실의 권세는 진평왕 초기에 점차적으로 굳건해졌다. <화랑세기> 세종 편에서는, 즉위 당시의 진평왕이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나이 많은 후궁인 미실이 조정을 마음대로 농단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는 법.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진평왕이 성장함과 함께, 또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김유신의 할머니)의 위상이 강화됨과 함께 미실의 권력도 서서히 약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미실의 협력자인 사도태후는 손자인 진평왕의 시대에 왕태후로 밀려나고, 미실이 소속한 대원신통의 경쟁그룹인 진골정통(또 다른 왕비혈통) 소속의 만호태후가 태후의 권세를 행사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만호태후와 미실은 제휴 관계?'실권은 가졌지만 그 스스로 왕이 될 수 없는 자'는 왕에 대한 장악력을 통해 권세를 부릴 수밖에 없었던 왕조시대의 정치구조 하에서, 미실은 진지왕 때에는 진지왕의 어머니이자 같은 대원신통인 사도태후와의 연대를 통해 왕을 장악할 수 있었지만, 진평왕을 옹립한 이후에는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와의 제휴를 통해 왕을 장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의 태후는 조선의 대비와 달리 왕비혈통이라는 특정 집단에서만 나올 수 있었기 때문에 조선의 대비보다 훨씬 더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그런 구조에 착안한 미실은 태후와의 협력체제를 통해 왕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던 것이다. 태후를 제치고 미실이 단독으로 왕을 장악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사도태후와 제휴했을 때랑 비교하면, 만호태후와 제휴한 시기에는 미실에게 중대 걸림돌이 있었다. 만호태후가 미실과 경쟁적인 혈통이었기 때문이다. 미실이 속한 대원신통과 만호태후가 속한 진골정통은 왕비를 배출하기 위해 상호 경쟁하는 관계였기 때문에, 미실과 만호태후의 연대는 어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는 협력인 동시에 경쟁의 관계였던 것이다. 진평왕의 배후에서 왕실을 움직인 두 사람 사이에는 서로 간의 관계를 자기 쪽에 유리하게 만들려는 긴장감이 끊임없이 감돌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시소를 탄 두 사람의 관계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바로 이 같은 두 사람 간의 시소 관계 속에서, 우리는 미실의 권력이 어느 시점부터 기울기 시작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 정치적 의미에서 미실의 '얼굴'이 야위기 시작한 시점을 두 사람 사이의 경쟁관계에서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유신 결혼 뒤에 숨겨진 만호태후와 미실의 연대그 점을 분석하는 데에 도움이 되는 두 개의 단서가 <화랑세기> 제15세 풍월주 김유신 편에 담겨 있다. 두 개의 단서에 담긴 속뜻을 비교함으로써 우리는 미실의 권력이 언제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는지를 알아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첫째 단서는 609년의 상황이다. 이 해에, 아버지가 가야파라는 핸디캡을 안은 소년 화랑 김유신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그가 화랑도 부제(제2인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유신에게 이런 행운이 생긴 배후에는 미실-만호태후 연대의 전략적 계산이 숨어 있었다. 만호태후의 외손자인 유신에게 출세길을 터줌으로써 만호태후와의 유대를 강화하려는 미실의 계산이 그 배후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김유신을 부제로 올린 배후의 원동력에 관해 <화랑세기> 김유신 편은 이렇게 말했다. "이는 대개 (미실) 궁주가 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그렇게 명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미실이 태후를 위로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저장'하고 '엔터'한 후에 둘째 단서로 넘어가기로 한다.
둘째 단서는 3년 뒤인 612년의 상황이다. 이번에도 김유신에게 행운이 찾아왔다. 화랑도의 수장인 풍월주에 오름과 함께, 김유신이 미실의 손녀인 영모(하종의 딸)와 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번에도 그 배후에는 미실-만호태후 연대가 있었다. 이 연대의 결속력을 높이기 위해, 김유신을 풍월주로 올림과 함께 김유신을 매개로 두 집안이 혼인을 치른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화랑세기> 김유신 편의 표현을 음미해 보기로 한다. "(만호)태후가 하종공의 딸 영모를 취하도록 명함으로써 미실 궁주를 위로했다." 여기서는 '태후가 미실을 위로했다'는 표현을 눈여겨둘 필요가 있다.
609년의 상황과 비교할 때에, 612년의 상황에서 나타난 인상적인 변화는 '위로의 주체'가 바뀌었다는 점이다. 609년에는 미실이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해 유신을 부제로 올린 데에 비해, 612년에는 만호태후가 미실을 위로하기 위해 유신을 미실 집안에 장가보낸 것이다.
위로의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은, 상대방을 위로할 수 있을 만큼의 유리한 위치를 점한 자가 바뀌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2개의 기록으로부터, 609년과 612년 사이에 미실이 '위로하는 자'에서 '위로받는 자'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그간에 미실의 위상에 중대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612년부터 야위기 시작한 미실의 권력609년과 612년의 두 시점 모두 미실은 만호태후와의 제휴를 통해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지만, 609년에는 만호태후보다 유리한 고지에 있었던 데에 비해 612년에는 만호태후보다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546~549년에 태어난 미실은 612년 시점에는 이미 66~69세였으므로, 이쯤 되면 권력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을 만도 하다.
만호태후와의 관계변화를 보여주는 <화랑세기>의 기록은 진평왕의 즉위 이후 정점을 향해 치닫던 미실의 권력이 김유신의 혼인(612년) 이전의 일정 시점부터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드라마 <선덕여왕> 식으로 표현하면, 진평왕의 즉위 이후로 가장 '통통해진' 미실의 얼굴은 612년경부터 현저히 '야위기' 시작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는 덕만의 공주 신분이 밝혀짐에 따라 미실의 권력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있지만, 실제 역사에서는 위와 같이 진평왕이 강해지는 한편 사도태후의 위상이 약화되고 만호태후의 위상이 강화됨에 따라 612년경부터 미실의 얼굴 아니 미실의 권력이 '야위기' 시작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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