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K연쇄살인] 경찰청에 나타난 괴신사 아브라함

김갑수 통일추리소설 BK연쇄살인사건 (12회) '세리머니'

등록 2009.08.08 12:22수정 2009.10.11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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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세리머니

수경, 피살자의 신원이 확인되자 다음 날 아침 한국의 신문들은 큼지막한 활자와 많은 지면으로 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기 시작했어. 하지만 피살자가 수구적 또는 냉전적 인물임을 언급한 신문은 거의 없더군. 종이 신문 하나와 인터넷 신문 두엇 정도가 조심스럽게 피살자의 그런 특이한 신상을 언급했을 뿐이지.

대부분의 언론은 고인은 국가관이 뚜렷한 학자였다고 말하며 그를 추모했어. 그가 대북포용정책에 반대하고 미국, 일본과의 유대를 강화해야 된다고 주장한 것은 애국충정의 발로였다고 썼지. 그는 무분별한 대북정책의 희생양이었다고 주장한 신문도 있었어. 신문들은 사건의 배후를 추정했는데, 대부분 북한과 연계된 남한 내 친북 세력의 소행일 것이라는 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더군.

이 일로 인해 남한 내 대북포용정책을 지지했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잠잠해질 수밖에 없었지. 언론들은 범인의 신분을 암시하는 듯한 B.K.라는 문자보다는 범행 대상자의 신원에서 범인을 반대로 유추하는 태도를 보여 주었지. 다시 말해 피살자가 보수니까 범인은 진보일 거라는 흑백논리였지. 나는 한국 일간지들의 이념적 양비론이 그다지도 지독한 줄을 처음 알았어.

아무튼 신문들은 과학적 근거에 바탕하여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는 분위기가 아니었어.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B.K.가 무엇인지 언론은 물론 수사진도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있었지. 그러나 당시로서 유일한 단서는 B.K.뿐이었는데 언론들은 그것을 한사코 외면하더군. 하기야 모르는데 별 수 있었겠어? 정부와 경찰에서는 애써 사건에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 했지. 그래서 어떤 미치광이가 저지르는 연쇄살인이라는 식으로 결론을 몰아가고 있었어.

내가 수경을 다시 본 것은 아마 그 즈음이었던 것 같군. 내가 한국의 정예 수사관들에게 행하는 특강의 강사로 연단에 나타날 줄을 수경은 전혀 예상치 못했을 거야. 나는 강연장에서 경찰청 간부에 의해 재미동포 아브라함으로 소개되었지. 그는 내가 법의학과 심리학과 곤충학 분야에 3개의 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범죄학자이며 미국 F.B.I.의 범죄 분석 프로그램인 VICAP(강력범죄 프로파일러 훈련 과정)를 만드는 데 결정적인 공로자였다고도 말했어.

나는 마이크 앞에 서자마자 수많은 경찰 간부들을 제치고 수경에게 먼저 인사를 했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조수경 수사관을 나는 압니다. 물론 그녀는 나를 잘 모릅니다. 그녀는 F.B.I. 교육 역사상 가장 우수한 프로파일러로 공인받았습니다. 최근 한국 경찰은 두 살인 사건으로 긴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한국의 경찰청에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해고한다면 그녀는 곧장 미국에서 더 좋은 직장을 얻을 것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내 조크는 다소 썰렁한 것이었어. 수경은 난감해 하는 표정을 짓더군. 나는 조금 미안한 마음을 느끼며 강의를 시작하기로 했어. 나는 특강 섭외를 받을 때, 한국 경찰이 최근 발생한 일련의 살인사건들에 대해 말해 달라고 할 줄 알았어. 그래서 나는 나를 만나러 온 경찰청 간부에게 대뜸, '테러 살인에 대해 말하면 되느냐?'고 물었지. 그는 테러살인이라는 말에 다소 당황하는 듯하더니, '청에 들어가 전화로 답변 드리면 안 되겠느냐'고 되묻더군. 물론 나는 그러라고 했지.


저녁때에 그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일반적인 연쇄살인범에 대한 얘기를 해 달라고 했어. 나는 수경에게 거의 도움이 안 되는 얘기를 하게 되어 그랬는지 강의에 조금 맥이 풀렸던 게 사실이야. 하지만 강의의 제재 자체가 사람을 긴장시키는 것이라서 그런지 수강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진지하더군. 그러고 보면 한국만큼 경찰의 학구열이 높은 나라도 없을 거야.

나는 '연쇄살인의 추이'라는 강의 주제를 먼저 소개하고 곧장 논점으로 들어갔지.

"연쇄살인범에게 살인 행위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세리머니(의식,儀式)입니다. 평소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감을 갖지 못했던 사람에게 그것은 쾌감이 되기도 합니다. 대부분 쾌감을 얻는 행위가 그렇듯이, 이 무서운 폭력 행위에는 알코올이나 마약보다 더 강렬한 중독성이 있습니다.

중독자들이 알코올이나 마약을 애지중지하듯이 연쇄살인범은 살인 행위를 대단히 중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의 대상을 선정한 후 납치, 희롱, 고문, 살해 그리고 사체 유기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 자체가 모두 행위의 목적이 됩니다. 이와 같이 살인을 세리머니로 인식한다는 점이 연쇄살인범의 변별성입니다.

살인자는 정상적인 사회 복귀가 어렵습니다. 게다가 살인 행위는 갈수록 그에게 존재감을 심어 줍니다. 그러므로 살인 행위는 반복됩니다. 무서운 것은 살인이 반복되면서 그 수법이 진화된다는 점입니다. 유력한 가설에 의하면 연쇄살인범은 살인의 순간에 가히 폭발적인 성적 오르가슴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든지 정점에 이르기까지는 단계적 과정이 있는데 바로 이 단계적 과정을 잘 분석하는 일이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이 됩니다.

평범한 일상생활을 영위하던 살인자는 어느 날 신체와 감각에 이상이 나타납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변의 사물들이 갑자기 슬로비디오처럼 느려지는 반면, 소리와 빛깔은 보다 더 선명하고 생생해집니다. 그리고 후각과 촉각도 예민해집니다. 말하자면 판타지를 체험하기 위한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는 살인 의식의 판타지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면 대상을 물색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휩싸입니다.

그가 대상을 물색하기 시작하는 순간 판타지는 약화됩니다. 반면 현실 감각은 돌아오지 않고 범의는 돌이킬 수 없는 의지로 굳어집니다. 어떤 연쇄살인범은 이때 자신이 현실감각을 잃었다는 말을 주변 사람에게 했다고 보고된 사례가 있습니다. 이럴 때 전문가의 상담과 치료를 받으면 범죄 행위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연쇄살인범들은 범행이 끝날 때까지 잃어버린 현실감을 되찾지 못합니다.

약화되었던 판타지는 이제 현실처럼 그의 뇌리에 출몰합니다. 그는 범행 대상을 찾아 나섭니다. 이를 낚시질 단계, 즉 '더 토울링 페이즈(The tolling phase)'라고도 합니다. 그는 강박적 충동 속에서 법률과 관습을 망각합니다. 그는 동물적 존재가 되어 화학적 자극에만 반응하게 됩니다.

이때 마음의 근저에 앙금으로 남아 있던 양심이 준동하게 됩니다. 괴로워진 그는 알코올이나 마약을 하는 수도 있습니다. 스스로를 치료해 보려는 마지막 노력인 셈입니다. 그러나 미상불 알코올이나 마약은 그의 욕망을 더욱 끓어오르게 만듭니다. 항체가 아니라 촉진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낚시꾼이 떡밥을 던져 놓고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듯이 컴컴한 지하 주차장이나 인적 드문 샛길이나 숲이 우거진 여학생 기숙사 주변에서 앉아 있거나 서성거립니다. 물론 그들이 잠복하는 장소는 낚시꾼의 취향에 따라 다릅니다.

미국의 존 케이시는 소년을 찾기 위해 호스트 바 밀집촌을 기웃거렸고, 테드 번디는 예쁜 여학생을 찾아 자신이 다니던 시애틀 대학교의 여학생 기숙사를 탐색했습니다. 칼튼 게리는 노년 여성을 구하러 부촌과 실버타운 부근을 배회했습니다. 아직 해결을 못 보고 있는 한국 경기 남부 화성 인근의 연쇄살인범은 농촌의 샛길이나 야산 길을 낚시 장소로 선택했습니다.

연쇄살인범에게 피해자가 저항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그는 대상을 완전히 제압하거나 안심시킵니다. 심지어 일부 여성은 유인하는 남성을 매력적으로 보는 사례도 있습니다. 자진해서 살인마의 품으로 기어 들어가는 셈이지요.

덧붙이는 글 | 브라이언 이니스의 역저 <프로파일링>을 참조한 부분입니다.


덧붙이는 글 브라이언 이니스의 역저 <프로파일링>을 참조한 부분입니다.
#연쇄살인 #세리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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