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석탑 세부사진.아랫부분은 석등의 복련형의 하대석을 쓴 것으로 보이며, 그 위의 추정 옥개석은 흡사 다포를 닮았다.
오은석
1층과 2층의 추정 옥개석 중 1층의 돌이 더욱더 조각이 섬세하게 남아있다. 앞서 옥개석으로 추정된다고 하였지만 상대갑석(上臺甲石)이나 갑석부연(甲石副椽)일 가능성도 있다. 이 돌의 가장 큰 특징은 섬세한 조각이 남아있다는 점인데, 그 모습을 자세히 보면 꼭 목조건축에서 공포(栱包)를 보는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다포식(多包式)이라는 형식을 연상시킨다.
별거 없는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이러한 추론이 가능하다면 파사석탑의 성격에 대해 다시 한번 깊게 생각해 볼 필요가 생긴다. 조각이 다포식을 표현한 것이고, 그 아래에 우주와 탱주가 놓여 마치 목조건축처럼 생긴 석탑이었을 것이라 추정해본다면 그 모습은 매우 화려하고, 또한 독특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과연 파사석탑이 가야의 것인가에 대한 강한 의문이 생긴다.
일단 다포식을 표현한 것이라 친다면 그 시대는 고려 후기까지 올라가게 된다. 다포식은 중국에서는 요나라 때 발생하여 송나라와 원나라 때 널리 쓰였다. 우리나라는 원나라의 영향을 받아 들어왔으며, 이 당시엔 그러한 영향들을 바탕으로 독특한 석탑들이 많이 조영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 내에 있는 국보 86호인 경천사십층석탑 등이 이러한 예에 속하며 이는 당시 활발한 교역이 예술에도 영향을 미친 사례에 속한다.
그럼 파사석탑도 이와 비슷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추론이지만, 기존의 가야시대 석탑이라는 이야기와는 별도로 그보다 후에 조성되었을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목탑의 양식을 상당수 반영하였고, 이를 표현한 매우 아름다운 조각들이 시대가 혼란해 짐으로 인하여 파괴나 도난이 되었으리라 생각해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잔해들은 그러한 훼손의 추억을 지닌 쓸쓸한 잔해인 것이다.
파사석탑은 진기한 모양새 때문에 관심을 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는 그렇게 많지 않다. 단순히 전설 속에만 자리를 꿰차게 하기보다, 그에 대한 역사성을 파악하여 잠에서 깨우는 것도 후손된 도리가 아니나 싶다. <삼국유사>에 적힌 파사석탑에 대한 시로 글을 맺어본다.
탑을 실은 붉은 배의 가벼운 깃발덕분에 바다 물결 헤쳐왔구나어찌 언덕에 이르러 황옥만을 도왔으랴천년 동안 왜국의 침략을 막아왔구나 덧붙이는 글 | 6월 23일에 갔다온 수로왕비릉 중 파사석탑에 대해 자세히 다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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