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혼자 집 나가면 개고생? 맞다!

[책으로 읽는 여행 40] 도보여행가 유혜준의 <여자, 길에 반하다>

등록 2009.09.01 09:03수정 2009.09.01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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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집 나가면 개고생'이란 카피를 내세워 고객을 유치하는 광고가 유행이다. 타 통신사로 이동하는 고객들을 붙잡기 위한 문구인데, 괜히 사람들을 미소 짓게 하는 매력이 있다. 다들 누구나 한번쯤 집을 나가 고생해 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 <여자, 길에 반하다>는 그야말로 집 나가서 개고생을 사서 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책은 젊은 나이도 아닌 오십 줄에 들어선 저자가 도보 여행의 매력에 빠져들면서 이 길 저 길 다 걸어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이 광고 카피처럼 고생이 눈에 훤한 글들로 가득 차 있다.


책을 읽다 보면 서울에서 십 년 넘게 살았지만 모르는 길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든다. 서대문 역을 시작으로 하여 소의문 터까지 걷는 서울 성곽길이라든가, 6호선 한강진 역을 출발로 남산 구석구석을 훑는 길은 나도 한번 쯤 걸어보고 싶은 곳이다.

서울이 걷기 어렵다고? 이렇게 걸을 곳이 많은데

이렇게 걸을 만한 곳이 많은데 사람들은 서울이 걷기 어려운 도시라고 생각한다. 비록 빌딩숲과 아스팔트 도로가 대부분인 도시지만, 틈새 걷기를 통해 서울의 작은 공간을 느껴본다면 이곳도 살 만한 느낌이 들 것이다. 저자가 건넌 한강대교도 서울 사는 사람이라면 걸어서 건너볼 만한 곳이 아닐까 싶다.

교육부 장관, 너가 근의 공식을 알어?
전두환 재산 29만 원
세상에 빽 있는 새끼들 좋겠다 잘 처 먹고 살아라
나 와따 추워 디져
**아 사랑해

이런 낙서들이 빼곡한 다리 난간을 보는 기분은 어떨까? 아쉽게도 한강대교의 이 재미있는 낙서들은 1년 후 개보수와 도색 작업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우스운 것은 엄청난 낙서들이 사라진 자리에 다시 또 새로운 낙서가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


천천히 걷기를 즐겼던 저자는 문득 호기심에 울트라 도보 행사에까지 참여하게 된다. 여기서부터 걷기 여행의 개고생은 시작된다. 느릿느릿 주변을 감상하며 걷는 저자의 습관과는 다르게 울트라 도보는 빠르게 걷기 대회인 것이다. 40킬로미터 지점에서 포기를 하지만, 은근 중독성이 생겨 나중에 다시 참여하고 싶다는 저자의 말은 걷기의 중독성을 실감하게 한다.

저자의 개고생이 극에 달하는 것은 바로 '제주 올레 완주하기'다. 일주일씩 두 번에 걸쳐 제주 걷기 여행을 시도한 저자는 중간에 길을 잃는 체험을 거듭하고 아무도 없는 숲 속, 바닷가를 혼자 걸으며 사색에 잠긴다.

우리나라에서 모래사장이 가장 길다는 표선 해수욕장에서 드넓은 모래사장 뒤에 바다가 저 끝에 조금 달려 있는 색다른 풍광을 만나고, 노란 갯국화가 핀 제주의 겨울을 만끽하며 그녀의 걷기는 점점 단련되는 듯하다.

숙소를 찾기 어려워 모텔이나 도미토리 룸과 같은 엉뚱한 곳에 여자 혼자 툭 떨어져 하룻밤을 지내게 되면 어떤 느낌일까? 저자의 걷기 여행은 이처럼 엉뚱함의 연속이다. 혼자 여행을 하게 되니 편안할 날이 하루도 없다. 어쩌면 저자는 이런 예상 밖의 상황을 즐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걷기, 이거 은근히 중독성 있네

그래서 그처럼 개고생을 하고도 또 다시 중독 증세가 찾아온 사람처럼 제주 올레에 다시 나서게 되었을 것이다. 어떤 날은 걷는 동안 식당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해 오후 네 시가 되어서야 점심을 먹기도 하고 어떤 날은 비가 계속 내려 비옷을 입은 채 귓가를 때리는 빗소리에 취해서 걷는다.

제주의 걷기 여행은 참 변수가 많다. 걸으며 소똥 말똥 밟는 건 부지기수며, 간혹 뱀이나 말을 맞닥뜨리는 경우도 있다. 몇 시간 걷는 동안 사람 그림자 하나 보지 못할 때도 있으니 혼자 여행하기 무섭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저자는 계속 걸을 것이란다.

비록 책에는 담지 못했으나 남해와 섬 걷기를 올해 시도했고, 앞으로도 쭉 도보 여행을 다닐 계획이라는 저자. 그런 그녀의 모습이 부럽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아름다운 모습을 눈과 가슴에 담는 일에 저자는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도보 여행에서 그녀가 느낀 감상들은 블로그 '올리브의 뜨락'를 통해 만날 수 있다. 내가 가보지 못한 곳을 일일이 걸어서 여행하는 그녀의 여행기는 마치 함께 길을 걷는 듯한 느낌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마음 한 구석에 이런 생각이 든다. '아, 나도 언젠가는 꼭 이 길을 혼자서 걸어 봐야지.' 그런데, 혼자인 걸 싫어하고 무서움이 많은 내가 과연 그녀처럼 용감히 길을 떠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그녀의 여행이 더더욱 대단해 보인다.

여자, 길에 반하다 - 가벼운 걷기에서 울트라 도보까지

유혜준 지음,
미래의창, 2009


#도보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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