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사성어'보다 좋은 우리 '상말' (77) 차일피일

[우리 말에 마음쓰기 765] '차일피일 미루다'가 잘못된 말인 줄 아는 분은?

등록 2009.10.02 16:13수정 2009.10.02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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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차일피일 미루던 빨래

.. 오늘 같은 날은 빨래하기 좋은 날, 빨래가 잘 마르는 날, 차일피일 미루던 빨래를 했다. 빨랫줄이 모자랄 정도다. 바지랑대가 휘청거린다 ..  《박남준-꽃이 진다 꽃이 핀다》(호미,2002) 110쪽


"빨랫줄이 모자랄 정도(程度)다"는 "빨랫줄이 모자랄 만큼이다"나 "빨랫줄이 모자란다"나 "빨랫줄이 모자랄 판이다"로 다듬어 봅니다.

 ┌ 차일피일(此日彼日) : 이날 저날 하고 자꾸 기한을 미루는 모양
 │   - 일을 차일피일 미루다 / 차일피일 끌기만 한다 / 차일피일 지내다 보니 어느새
 │
 ├ 차일피일 미루던 빨래
 │→ 이날저날 미루던 빨래
 │→ 저날그날 미루던 빨래
 │→ 자꾸만 미루던 빨래
 │→ 자꾸자꾸 미루던 빨래
 └ …

한자말 '차일'은 국어사전에 따로 실려 있고, 한자말 '피일'은 따로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국어사전에 따로 실린 '차일'이 두루 쓰이는 일은 없었다고 느낍니다. 국어사전에 따로 안 실린 '피일' 또한 딱히 쓰이는 일이 한 번도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이 두 낱말이 더한 '차일피일'은 용하게 자주 쓰입니다. 한자말 '차일'과 '피일'이 어떤 뜻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은 몹시 드물지 않으랴 싶은데, 두 한자말을 더한 '사자성어'는 더없이 자주 쓰인다고 느낍니다.

 ┌ 늑장부리며 미루던 빨래
 ├ 꾸물거리며 미루던 빨래
 ├ 게으름 피우며 미루던 빨래
 └ …

국어사전 말풀이에서 '차일피일'을 찾아보면 "이날저날 미루는 모양"을 뜻한다고 합니다. '차일 = 이날'이고, '피일 = 저날'인데, 두 낱말이 묶이면서 "이날저날 미루는"이 되고, 이렇게 '미루는'을 가리키는 낱말이기에 "차일피일 미루는"처럼 적으면 겹말이 됩니다. "차일피일하다"처럼 적거나 "이날저날 미루다"처럼 적어야 올바릅니다.


또는, "내일 하지 하며 미루던"이나 "다음에 하지 하며 미루던"이나 "나중에 하지 하며 미루던"으로 다듬어 줍니다. "모레쯤 하지 하며 미루던"이나 "이 다음에 하지 하며 미루던"이나 "좀 있다가 하지 하며 미루던"으로 다듬어도 어울립니다.

 ┌ 오늘내일 하며 미루던 빨래
 ├ 모레글피 하며 미루던 빨래
 ├ 내일모레 하며 미루던 빨래
 └ …


가만히 보면, 한 마디로 '미루다'라고만 해도 넉넉합니다. '늑장부리다'라고 해도 됩니다. '꾸물거리다'라고 해도 알맞고, '게으름을 피우다'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오늘날 한국사람들은 모조리 빨리빨리만 외치고 있다 하는데, 하나하나 살피면 '자꾸 미루려는 모습'을 나타내는 낱말과 말투가 제법 많습니다. 꼭 늑장을 부리는 모습이라고만 말할 수 없으나, 딱히 느긋하게 살려는 매무새라고만 가리킬 수 없으나, 그저 빠르게 움직여야만 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말씨가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ㄴ. 차일피일 미뤄 왔던

.. 그때까지 아내도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몰라 차일피일 미뤄 왔던 터였습니다 ..  《안재구,안영민-아버지 당신은 산입니다》(아름다운사람들,2003) 33쪽

말하기 어려워서 미루고, 말하기 껄끄러워서 미뤄 둔 일이 누구한테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몸소 하기 번거로워서, 스스로 하기 달갑지 않아서 미뤄 두는 일이 저마다 한 가지쯤 있으리라 봅니다.

말을 알맞게 다스리거나 글을 슬기롭게 가꾸는 일을 어려워서 미루는 사람이 있을 테며, 껄끄럽다며 미루는 사람이 있을 테고, 번거롭다 느끼며 미루는 사람이 있는 가운데, 달갑지 않다며 미루는 사람이 있으리라 봅니다. 또는, 귀찮아 하는 사람이 있을 테고, 그런 쓸데없는 짓을 왜 하느냐고 따질 사람도 있으리라 봅니다.

 ┌ 차일피일 미뤄 왔던 터
 │
 │→ 자꾸 미뤄 왔던 터
 │→ 내내 미뤄 왔던 터
 │→ 늘 미뤄 왔던 터
 └ …

할 일은 그때그때 해야 좋습니다. 미룬다고 잘되거나 좋게 될 일 하나 없습니다. 그래, 우리가 쓰는 말 한 마디도 오늘부터 올바르게 쓰도록 마음을 다져 먹고 애써야 잘 쓸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이나 삶에 좋습니다. 오랫동안 익숙하게 써 왔기에 고치기 어렵다며 미룬다면, 그다지 잘못되었다고 못 느끼겠어서 다듬어 내지 않겠다며 미룬다면, 그까짓 말 한두 마디야 아무렇게나 쓰면 어떠하느냐며 추스르지 않고서 미룬다면, 이렇게 잘못 쓰는 말마디가 늘고 쌓이면서 곪고 터져 버립니다. 나중에는 아주 손쓸 수 없을 만큼 망가지거나 더럽혀져 있기 마련입니다.

 ┌ 하염없이 미뤄 왔던 터
 ├ 끝도 없이 미뤄 왔던 터
 ├ 이제나 저제나 미뤄 왔던 터
 └ …

옳게 말하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 옳게 생각하기 어려운 매무새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참되게 말하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 참되게 생각하기 어려운 매무새가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꾸밈없이 말하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 맑고 밝게 말하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 슬기롭고 싱그럽게 말하지 못하는 매무새일 때, 우리 모습이며 삶이며 아름답거나 넉넉할 일이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말마디 하나를 가다듬으며, 생각마디 하나를 가다듬습니다. 생각마디 하나를 가다듬는 가운데 삶마디 한 구석을 차근차근 가다듬습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옛말은 그저 나온 말이 아닙니다. 말이든 생각이든 삶이든, 언제나 하나씩 차근차근 하면서 닦아 나가야 함을 숱한 사람이 온몸으로 겪었기 때문에 나온 말입니다. 말이든 생각이든 삶이든, 오래도록 꾸준히 가다듬고 삭이고 받아들이고 북돋워야 한다는 깨우침을 한 마디 글줄에 살뜰히 담아내면서 이어왔다고 봅니다.

말 한 마디를 살리며 내 생각줄기를 살립니다. 내 생각줄기를 살리면서 내 삶줄기를 일으킵니다. 다만, 하루아침에 살리지는 못합니다. 열 해나 스무 해가 걸릴 수 있고, 서른 해나 마흔 해로도 모자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매한가지 몸짓과 마음결로 꿋꿋하게 걸어갈 뿐입니다.

어제와 같이 오늘도 곱다시 걷습니다. 오늘과 같이 모레와 글피도 어여쁘게 발걸음 내딛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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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성어 #상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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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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