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마디 한자말 털기 (83) 심하다甚

[우리 말에 마음쓰기 790] '심한 돌풍', '더 심해졌다', '심하게 억누른다' 다듬기

등록 2009.11.04 16:06수정 2009.11.04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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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심한 돌풍

 

.. 새벽에 심한 돌풍이 몰아치더니 오후까지 계속 바람이 불었다 … 밤이 되자 살을 파고드는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  《마가렛 쇼/이혜경 옮김-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일기》(해바라기,2004) 80, 82쪽

 

 '오후(午後)까지'는 '낮'이나 '늦게까지'로 다듬고, '계속(繼續)'은 '줄곧'이나 '내처'나 '끊임없이'나 '쉬지 않고'로 다듬어 줍니다.

 

 ┌ 돌풍(突風)

 │  (1) 갑자기 세게 부는 바람

 │   - 돌풍이 일다 / 돌풍이 불다

 │

 ├ 심한 돌풍이 몰아치더니

 └ 매서운 바람이 불었다

 

 갑자기 세게 부는 바람을 가리키는 한자말 '돌풍'입니다. 이 돌풍 가운데에도 '심한 돌풍'과 '가벼운 돌풍'이 있다고 나눌 수 있다고도 하겠습니다만, 이 보기글에서는 그리 어울리지 않아 보입니다. 이 보기글에서는 '지나친'이나 '거센'을 가리킬 외마디 한자말 '심한'이 아니라 '모진'이나 '무서운'이나 '무시무시한'이나 '끔찍한' 같은 꾸밈말을 넣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또는 '사나운'이나 '매서운' 같은 꾸밈말을 넣어 주든지요.

 

 그런데 이 보기글을 적은 다음에 곧바로 "매서운 바람"이라는 말마디가 나옵니다. 읽던 책을 덮고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이 책을 우리 말로 옮겨적은 이는 일부러 앞과 뒤를 다르게 나타내고자 이처럼 적었을까요? 두 말마디가 영어로 달리 적혔기에 이처럼 옮겼을까요?

 

 ┌ 사나운 바람

 └ 매서운 바람

 

 앞과 뒤를 달리 적고 싶었다면, 앞에서는 "사나운 바람"이라 하고 뒤에서는 "매서운 바람"이라 하면 됩니다. 앞에서는 "거친 바람"이라 하고 뒤에서는 "거센 바람"이라 하면 됩니다. 앞에서는 "모진 바람"이라 하고 뒤에서는 "무시무시한 바람"이라 하면 됩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과 느낌을 가장 잘 담아낼 말마디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주면 좋겠습니다. 우리 손으로 우리 얼과 넋을 한껏 슬기롭게 보여줄 글줄이 무엇인지를 헤아려 주면 고맙겠습니다. 빛이 나는 말을 우리 스스로 찾고, 사랑이 스민 글을 우리 손으로 일구면 반갑겠습니다.

 

 

ㄴ. 굶주림은 더 심해졌다

 

.. 살쾡이는 숲속에서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 새끼가 태어나자 굶주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게다가 새끼를 돌보느라 사냥할 시간도 없어졌다 ..  《이마이즈미 요시하루(글),다니구치 지로(그림)/김완 옮김-시튼 (2)》(애니북스,2007) 23쪽

 

 "두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는 "새끼 두 마리를 낳았다"로 다듬고, "사냥할 시간(時間)"은 "사냥할 틈"이나 "사냥할 겨를"로 다듬어 줍니다. '기아(飢餓)'라 하지 않고 '굶주림'으로 적은 대목은 반갑습니다.

 

 ┌ 굶주림은 한층 더 심해졌다

 │

 │→ 굶주림은 한층 더 몰려왔다

 │→ 한층 더 굶주리게 되었다

 │→ 한층 더 굶주렸다

 └ …

 

 굶거나 주리면 고달픕니다. 굶는 괴로움과 주리는 힘겨움은 겪어 보지 않고는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머리로 생각할 수 있는 굶음과 주림이 아닙니다. 몸으로 느껴야 하는 굶음과 주림입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 힘겹거나 고달픈 이웃을 기꺼이 돕지 못하는 가장 큰 까닭은, 우리가 머리로는 '이웃을 돕거나 사랑해야지' 하고는 알고 있어도, 우리 몸으로 '굶음이 얼마나 힘겹고 주림이 얼마나 고달픈지'를 느껴 보지 못한 탓이 아니랴 싶어요. 국가보안법이 우리 생각과 넋을 얼마나 잡아먹거나 깎아내리거나 무너뜨리는지를 살갗으로 느끼지 못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대학졸업장이 우리 마음과 얼을 얼마나 갉아먹거나 업신여기거나 짓밟는지를 온몸으로 부대끼지 못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각해 보면, 어느 한 가지를 몸소 느끼거나 부대끼면서, 이와 얽히거나 이어진 수많은 다른 일 또한 찬찬히 느끼거나 부대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가지뿐 아니라 수많은 일을 겪거나 부대끼면서도 속내를 제대로 읽어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아무래도 빈가슴이기 때문에 이러지 않느냐 싶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막힌 가슴인데다가 차가운 가슴이라서 이웃과 동무를 넉넉히 껴안을 수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ㄷ. 아내를 심하게 억누른다

 

.. 밖에서 심하게 억눌린 남자는 집에서 자신의 아내를 심하게 억누른다 ..  《우어줄라 쇼이 엮음/전옥례 옮김-여자로 살기, 여성으로 말하기》(현실문화연구,2003) 94쪽

 

 "자신(自身)의 아내"는 "자기 아내"로 고쳐쓰면 토씨 '-의'가 떨어집니다. 또는 "내 아내"로 적을 수 있고, 이 자리에서는 "남자는 집에서 아내를"처럼 적어 보아도 잘 어울립니다.

 

 ┌ 심하게 억눌린 남자는

 │→ 괴롭게 억눌린 남자는

 │→ 끔찍하게 억눌린 남자는

 │→ 몹시 억눌린 남자는

 │

 ├ 자신의 아내를 심하게 억누른다

 │→ 제 아내를 모질게 억누른다

 │→ 제 아내를 못살게 억누른다

 │→ 제 옆지기를 끔찍하게 억누른다

 │→ 제 옆지기를 짓궂게 억누른다

 └ …

 

 보기글 앞과 뒤에 나란히 나타나는 '심하게'는 꾸밈말 노릇을 합니다. 두 자리 모두 '몹시'나 '크게'를 넣어서, "밖에서 몹시 억눌린 남자"와 "아내를 몹시 억누른다"로 적을 수 있습니다. 또는, '지나치게'를 넣거나 '잔뜩'을 넣어도 잘 어울립니다. 느낌을 살려 '괴롭게'나 '끔찍하게'를 넣는달지, '고단하게'나 '힘겹게'를 넣어도 됩니다. 아니면, '있는 대로'나 '짜증스레'를 넣으며 무엇 때문에 어떻게 억눌리면서 마음에 생채기가 쌓이는가를 그려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을 억누르는 일은 '못살게' 구는 일이기도 하고 '괴롭히는' 일이기도 하며 '들볶는' 일이기도 합니다. 얄궂은 짓이고 짓궂은 짓이요 못난 짓입니다. 끔찍한 노릇이지요. 안타깝고 안쓰럽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밖에서 억눌린 응어리를 안에서 '죽어라' 쏟아내기 일쑤입니다. 서로서로 슬기롭게 풀어내면서 흐뭇하게 얼싸안는 길로는 좀처럼 나아가지 못합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살갑게 마무리짓지 못합니다. 말과 말 사이에서도 반갑게 여미지 못합니다. 삶과 삶 사이에서도 올바르게 일구지 못합니다. 사람이며 말이며 삶이며 나날이 뒤틀리기만 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1.04 16:06ⓒ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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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마디 한자말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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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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