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362)

― '쾰른에서의 짧은 체류기', '남미에서의 첫날' 다듬기

등록 2009.11.23 18:43수정 2009.11.23 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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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쾰른에서의 짧은 체류기를 거쳐

 

.. 쾰른에서의 짧은 체류기를 거쳐, 다시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1963년, 윤이상의 인생에 지우지 못할 상처를 남긴 북한 방문이 이루어진다 ..  《윤신향-윤이상, 경계선상의 음악》(한길사,2005) 39쪽

 

 '체류기(滯留期)'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체류한 기간"을 줄여 이처럼 적었겠지요. 그래서 앞말과 이어 "쾰른에 짧게 체류한 다음"이나 "쾰른에 짧게 머문 다음"이나 "쾰른에서 한동안 지낸 다음"이나 "쾰른에서 얼마쯤 지내고 나서"로 다듬어 줍니다. '이주(移住)하는'은 '옮기는'으로 손보고, '인생(人生)'은 '삶'으로 손보며, "윤이상의 삶에서"는 "윤이상 씨 삶에서"로 손봅니다. '상처(傷處)'는 '생채기'로 손질하고, '방문(訪問)'은 '나들이'로 손질합니다.

 

 ┌ 쾰른에서의 짧은 체류기를 거쳐

 │

 │→ 쾰른에서 잠깐 머문 다음

 │→ 쾰른에서 짧게 머문 뒤

 │→ 쾰른에서 얼마쯤 지내다가

 │→ 쾰른에서 한동안 살다가

 └ …

 

 우리 말은 우리 말법으로 움직입니다. 우리 생각을 나타내는 우리 말은 예부터 고이 이어온 우리 말투로 담아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글로든 말로든, 몇 군데 낱말을 잘못 쓰더라도 뜻은 어느 만큼 알아듣습니다. 이를테면 받침을 잘못 썼다든지, 토씨를 잘못 붙였다든지, 말차례가 조금 엉뚱하더라도 알아듣습니다. "너 어재 거이 있었잖아"로 적어도, "너의 형이 그랬어"로 써도, "제가 잘못 가리킨 탓입니다"로 적바림해도, 딱히 어려움 없이 알아들어요.

 

 다만, 이렇게 써도 알아듣는다고 해서, 말하거나 글쓰는 이가 그 뒤로도 제 잘못된 말투나 글투를 안 바로잡는 일이 올바르다고 할 수 없습니다. 길을 가다 샛길로 빠지더라도 바른 길로 돌아와야 하고, 비틀비틀 걷더라도 제 갈 길을 걸어야 하듯, 우리가 쓰는 말도 알맞고 곧바른 쪽으로 나아가도록 마음을 기울여야지요.

 

 ┌ 독일에서의 짧은 출장기를 거쳐

 └→ 독일에서 짧게 일을 본 다음

 

 우리 말에서는 '-에서 + 의' 토씨를 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말에서는 이런 토씨를 씁니다. 널리 씁니다. 일본책을 어설피 우리 말로 옮기면, 이런 얄궂은 토씨가 스며듭니다. 처음 한두 번 읽거나 들을 때에는 그러려니 하지요. 어딘가 어색하거나 어설프더라도 '말투나 말법'보다는 '말에 담긴 줄거리와 속생각'을 살피느라 맞춤법이나 말법은 잊거나 지나치곤 하고요.

 

 가만히 생각해 보셔요. 신문이나 잡지나 방송에서 '새로 나온 어떤 책'을 비평한다고 할 때, 새로 나온 책에서 쓴 '말과 글이 얼마나 알맞고 올바르고 깨끗한가'를 따지는 일이 있던가요? 대통령이나 정치꾼이 내놓는 공약이나 말을 들으며 '그 공약이나 정책이 얼마나 올바르고 알맞는가'를 살필 뿐, '공약이나 정책을 나타내는 말법과 말투가 얼마나 올바르고 알맞는가'를 따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들이 '학생들한테 가르칠 이야기를 제대로 가르치는가'만 살필 뿐, '교사들이 쓰는 낱말과 말투가 얼마나 올바르고 알맞는가'를 헤아리거나 따지는 사람 또한 거의 없습니다. 아예 없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에서 쓰이는 말이든, 텔레비전 새소식을 들려주는 말이든, 라디오에서 흐르는 말이든, 인터넷에 넘치는 갖가지 정보를 담은 글이든, 어떤 말과 글이라 해도 '올바르고 깨끗하고 알맞는 말과 글로 되어 있는가'를 따지거나 살피거나 되짚거나 돌아보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 형편이 이렇습니다.

 

 ┌ 한국에서의 마지막 밤

 └→ 한국에서 보낸 마지막 밤

 

 우리 말을 잊는 사람은 우리 얼을 잊는 셈입니다. 우리 말을 잃는 사람은 우리 넋을 잃는 셈입니다. 제 말, 제 글을 잊거나 잃는 사람은 제 생각과 길을 잊거나 잃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이런 대목까지 헤아려 보는 사람이 있기나 할는지요. 이런 자리를 살피는 사람이 있기나 할까요.

 

 어쩌다가 생각해 본다 한들, 자기 다른 일로 바쁘고, 이렇게 알뜰히 말해 보았자 돈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며, 어떻게 말하든 다들 잘 알아듣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저마다 해야 할 말과 저마다 해야 할 일을 잊거나 잃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들은 우리가 정작 가야 할 길과 우리가 나아갈 곳을 못 찾고 헤매지 않을까요. 말은 말대로, 삶은 삶대로, 뜻은 뜻대로, 길은 길대로, 올바르고 알맞고 아름다운 쪽으로 나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이기주의와 개인주의로 치닫기만 하는 세상에서는 이렇게 바라는 일이 참 부질없어 보입니다만, 부디 앞으로는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를 비손해 봅니다.

 

 

ㄴ. 남미에서의 첫날

 

.. 남미에서의 첫날. 가슴이 뛴다. 아니, 가슴 뛰는 건 이미 비행기가 한국을 떠나올 때부터 그랬다 ..  《저문강-영혼을 빗질하는 소리》(천권의책,2009) 24쪽

 

 "가슴 뛰는 건"은 "가슴 뛰는 일은"이나 "가슴 뛰기란"으로 다듬어 봅니다.

 

 ┌ 남미에서의 첫날

 │

 │→ 남미에서 첫날

 │→ 남미에서 보내는 첫날

 │→ 남미에서 묵는 첫날

 │→ 남미에서 맞이한 첫날

 └ …

 

 말잘못이라고 느낀다면 누구나 바로잡거나 고쳐씁니다. 말잘못이라고 느끼지 않는다면 어느 누구도 바로잡지 않고 고쳐쓰지도 않습니다. 토씨 '-의'를 붙이는 '-에서의'는 아무래도 오늘날 우리한테는 말잘못이 아니요 글잘못도 아니며, 그저 이 모습 그대로 우리 말투이며 문화라고 느끼는구나 싶습니다. 말멋을 살리거나 말맛을 키울 때 으레 나타나고, 글자수를 줄인다면서 이 같은 글투를 펼치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어릴 때부터 우리 말을 제대로 배우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 어버이들은 우리 아이들이 어릴 적부터 우리 말을 옳게 가르치는 일이 드뭅니다. 그저 '의사소통' 테두리를 넘지 않습니다. 말에 내 생각을 담고 글에 내 뜻을 싣도록 이끌어 주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들면 달라질까요? 아이들이 찾아가는 어린이집이나 학교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일찍부터 영어를 가르치느니 무슨무슨 학습을 하느니에만 마음을 쏟지, 아이들이 제 뜻과 마음과 넋을 아름다이 가꾸면서 살가이 펼치도록 돕지 못합니다. 글쓰기 공부나 글쓰기 학원에서도 아이들 스스로 마음껏 생각날개를 펴며, 싱그럽게 글날개와 말날개를 펼치도록 거들지 못해요.

 

 ┌ 남미 첫날

 ├ 남미에 내린 첫날

 ├ 남미를 밟은 첫날

 ├ 남미에 다다른 첫날

 ├ 남미로 찾아온 첫날

 ├ 남미땅을 디딘 첫날

 └ …

 

 나이가 한참 든 다음 몇 가지 책을 읽으며 말과 글을 다시금 돌아보는 분들이 드문드문 있습니다. 요즈음은 글쓰기 책이 곧잘 나오기도 하고, 우리 말과 글을 옳고 바르게 쓰도록 이끄는 책이 더러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우리 스스로 우리 말마디를 한두 가지라도 알뜰히 추스르거나 보듬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처음에는 몇 번 추스르기도 할 테지만, 이내 저마다 오래도록 길들어 온 말투로 돌아가 버리곤 하며, 책에 나온 지식을 넘어서면서 스스로 내 말투를 북돋우기까지는 못합니다.

 

 값있는 말이나 뜻있는 말이란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힘있는 말이나 기운찬 말 또한 거의 없다 할 만합니다. 슬기 어린 말이나 아름다운 말은 몹시 드물다 할 만합니다. 빛있는 말이나 생각있는 말을 찾기는 몹시 힘들다 할 만합니다. 그저 그렇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1.23 18:43ⓒ 2009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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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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