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자말 '존재'가 어지럽히는 말과 삶 (49)

[우리 말에 마음쓰기 805]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두 존재' 다듬기

등록 2009.11.24 11:59수정 2009.11.24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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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이유야 어쨌든 남편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씨에게 남겨진 건 세 살배기 딸 영순이와 아직 세상 빛도 보지 못한 배 속의 아이뿐이었다 ..  《군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돌아오지 않는 내 아들》(삼인,2008) 126쪽

 

 '이유(理由)'는 '까닭'으로 손보고, '더 이상(以上)'은 '더는'으로 손봅니다. "남겨진 건"은 "남겨진 사람은"으로 다듬고, "배 속의 아이"는 "배속에 있는 아이"나 "배속에서 크는 아이"로 다듬어 봅니다.

 

 ┌ 남편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

 │→ 남편은 더는 세상에 살아 있지 않았다

 │→ 남편은 더는 세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 남편은 더는 세상사람이 아니었다

 │→ 남편은 더는 없는 사람이었다

 │→ 남편은 그저 죽은 사람이었다

 └ …

 

 남편을 군대에서 '알 수 없는 죽음(의문사)'으로 잃어야 했다고 합니다. 죽은 남편은 세상에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더는 없는 사람, 생각에만 있고 눈앞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입니다.

 

 ┌ 이씨에게 남겨진 건 (o)

 └ 이씨에게 존재하는 건 (x)

 

 보기글 뒤쪽을 보면 '남겨진' 아이들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이는 '살아서 남았'고, 남편은 '죽어서 안 남았'다고 하는 셈이니, 앞쪽에 쓰인 '존재하지' 않는 남편이란,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인 셈입니다.

 

 글쓴이는 앞과 뒤를 좀 다르게 쓰고픈 마음이라 이렇게 적지 않았으랴 싶기도 합니다. 그러면, 앞쪽은 '없었다'라고만 하고, 뒤쪽은 '남겨진'으로 적으면 잘 어울립니다. 또는, 있는 그대로 남편은 '죽었다'고 하거나 '죽어서 없다'고 해 줍니다.

 

 

ㄴ. 두 존재를

 

.. 인간과 나무를 동일시하는 문화는 세계 여러 곳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많은 문학 작품과 시, 예술 작품이 이 두 존재를 유사한 것으로 표현한다 ..  《조안 말루프/주혜명 옮김-나무를 안아 보았나요》(아르고스,2005) 172쪽

 

 '동일시(同一視)하는'은 '하나로 보는'이나 '똑같이 여기는'으로 다듬습니다. '나란히 보는'이나 '나란히 놓는'이나 '나란히 놓는'으로 다듬어도 됩니다. '한 자리에 놓는'이나 '같다고 생각하는'으로 다듬어도 잘 어울립니다. "유사(類似)한 것으로 표현(表現)한다"는 "비슷하다고 여긴다"나 "서로 닮았다고 이야기한다"로 손질해 줍니다.

 

 ┌ 이 두 존재를

 │

 │→ 이 두 가지를

 │→ 이 둘을

 │→ 이들을

 │→ 이 사람과 나무를

 │→ 사람과 나무를

 └ …

 

 바라보기에 따라서, 나무와 사람은 많이 닮았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 나무와 사람은 조금도 닮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이 한 곳에 오래오래 뿌리를 내리며 지내기도 하지만, 뿌리 없이 떠돌기도 합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이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주기도 하지만, 가지와 잎사귀 없이 혼자 얌체처럼 쇠밥그릇 껴안기도 합니다. 사람은 나무와 같이 온갖 열매를 기꺼이 내주는 삶을 꾸리기도 하지만, 홀로 차지하며 이웃이 굶어도 모른 체하기도 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사람 스스로 사람다울 때에는 나무와 닮습니다. 사람 스스로 사람다움을 빛낼 때에는 꽃하고도 닮습니다. 사람 스스로 사람다움을 사랑할 때에는 새하고도 닮습니다. 사람 스스로 사람다움을 추스를 때에는 바람을 닮고 구름을 닮고 바다를 닮고 산과 들을 닮습니다. 그러나 사람 스스로 사람다움을 내차거나 내팽개칠 때에는 어느 한 가지하고도 닮지 않습니다. 그저 못난둥이요 허섭스레기입니다.

 

 ┌ 사람과 나무라는 목숨을

 ├ 사람과 나무가 걷는 길을

 ├ 사람과 나무가 살아가는 모습을

 └ …

 

 가까이에 나무가 있다면 늘 나무를 바라보면서 나무를 생각합니다. 손수 심고 돌보는 나무가 있다면 언제나 이 나무를 떠올립니다. 가까이에 나무가 없다면 저마다 가까이에 두는 무언가를 바라보면서 이 무언가를 생각합니다. 손수 돌보며 사랑하는 나무가 없다면 언제나 제 가까이 두면서 사랑하는 무언가를 떠올립니다.

 

 오늘날 우리 삶터에서는 나무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도심지에도 틀림없이 나무를 심어 놓고 있으나, 우리가 다 함께 껴안을 나무라거나 우리 스스로 더욱 사랑할 나무라고 하기는 힘듭니다. 그예 '저기에 나무가 있어'일 뿐입니다. '내 마음이 가닿는 애틋한 나무야'이지 않습니다.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나, 도심지에 심어 놓은 나무는 기껏 수십 수백입니다. 더구나 제 삶을 알뜰히 지킬 수 없는 나무요 밤낮이 없이 시달리는 나무입니다. 보느니 자동차요 껴안느니 아파트입니다. 다루느니 돈이요 흥청거리며 퍼마시고 내버리는 물질문명입니다.

 

 ┌ 두 목숨을

 ├ 두 목숨 삶을

 ├ 두 목숨 삶자락을

 └ …

 

 깊은 밤에 깨어났습니다. 새근새근 잠든 아기 옆에서 조용히 생각에 잠깁니다.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풀밭과 산들과 바다와 나무숲을 보고 자랄 때하고 이 도심지 한켠에서 자동차와 사람물결에 치이며 클 때하고 얼마나 다를까 하고. 마음밭은 사뭇 달라지겠지요?

 

 이 아이가 어릴 때부터 둘레에서 듣는 말은 어떠할까요. 우리 아이뿐 아니라 이웃 아니나 동네 아이는 어릴 때 집 안팎에서 어떤 말을 들으면서 크고 있을까요. 나중에 학교에 들어갈 때에,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함께 들여다볼 때에, 홀로 인터넷을 누빌 때에, 동무들하고 어울려 놀 때에, 아이들은 어떤 말을 들으면서 생각을 키우고 제 말씀씀이를 다스릴까요.

 

 말마디 하나를 생각하다 보면, 말마디를 이루는 우리 삶터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삶터를 생각하다 보면, 우리 삶터에 따라 좋게든 얄궂게든 건드리는 말마디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아이한테 건네는 말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을까요. 우리 식구 둘레 어른들은 서로서로 어떤 말마디를 어떤 마음결로 읊조리고 있을까요. 우리 식구는 어떤 삶을 바라보며 어떤 길을 걷고 있으며, 우리 식구 둘레 어른들은 어떤 꿈을 꾸며 저마다 어떤 말마디를 어떤 매무새로 펼치고 있을까요.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2009.11.24 11:59ⓒ 2009 OhmyNews
덧붙이는 글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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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 #한자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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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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