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버린 우리 말투 찾기 (41) 얄궂은 말투 11

[우리 말에 마음쓰기 888] '미래에 대한 비전', '경제력 있고' 다듬기

등록 2010.03.28 10:27수정 2010.03.28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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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미래에 대한 비전을 던져 준

 

.. 그때까지 어른이 된 모습을 상상하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던져 준 사람은 바로 그 간호사였다 ..  <유모토 가즈미/양억관 옮김-고마워, 엄마>(푸른숲,2009) 120쪽

 

'상상(想像)하지'는 '생각하지'나 '그리지'로 다듬습니다. '미래(未來)'는 '앞날로 손질하는데, 곧이어 '비전(vision)'이라는 영어가 튀어나옵니다. '비전'은 "내다보이는 장래의 상황"을 뜻한다는데, "장래의 상황"이란 "다가올 나날"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비전"처럼 적으면 뒤죽박죽 겹말이 되고 말아요. "앞날을 꿈꾸도록"이라든지 "앞날이 밝다고"라든지 "밝은 앞날이 있다고"라든지 "앞날을 사랑하라고"라든지 고쳐 주어야 알맞습니다.

 

 ┌ 나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던져 준 사람

 │

 │→ 나에게 미래를 생각하도록 한 사람

 │→ 나한테 내 앞날을 보도록 이끈 사람

 │→ 나한테 앞날을 꿈꾸도록 해 준 사람

 │→ 나한테 앞날을 그려 보도록 도와준 사람

 └ …

 

지난 2009년 8월부터 2010년 2월까지 예닐곱 달 동안 공공기관 누리집 말씀씀이를 돌아보는 일을 했습니다. 공공기관 누리집 수천 곳을 돌아보면서 '우리 말을 잘 쓰는 대목'을 드물게 찾아보기는 했으나 '우리 말을 잘못 쓰는 대목'을 더없이 많이 보아야 했습니다. 공공기관끼리 '잘 쓰는 말을 서로 나누는' 이야기마당이 없는 한편, '잘못 쓰는 말을 깨닫거나 깨우치도록 하는' 나눔마당 또한 없더군요.

 

기관마다 참 엉성하고 매우 엉성궂구나 싶은 말을 많이 자주 두루 쓰고 있는데, 이 가운데 한 가지를 꼽으면 '비전, vision, 미션, mission'이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목표, 계획, 전망'이라고 하던 말이요, 때로는 '다짐, 꿈, 앞으로는' 같은 쉬운 우리 말로 일컫던 말입니다. 어느새 거의 모든 공공기관이 '목표, 계획, 전망' 같은 한자말조차 안 쓰고 온통 영어로 '비전, vision, 미션, mission'을 읊고 있습니다. 더욱이 '비전'과 '비젼'을 섞어서 쓰거나 헷갈려 하는 곳이 있기도 합니다. 그저 대놓고 알파벳으로 적바림하는 기관 또한 꽤 많습니다.

 

"앞으로 할 일"이라든지 "우리 다짐"이라든지 "이루고 싶은 꿈"을 나타내는 자리에 으레 영어로 '비전'과 '미션'을 쓰고 있다고 할 텐데, 더 깊이 파고들어 살피면 공공기관만 이런 모습이 아닙니다. 공공기관을 비롯해 보수 오른날개 사람들이건 진보 왼날개 사람들이건 모조리 영어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땅에서는 어림 반 푼어치 없는 부스러기생각조차 영어를 덮어씌우면 그럴싸하게 보이는 줄 생각한달까요. 속알맹이를 들여다보면 하잘것없으나 영어 껍데기를 씌우면 대단하게 여긴다고 할까요.

 

 ┌ 내 앞날을 꿈꾸라고 해 준 사람

 ├ 내 앞날이 있음을 일깨운 사람

 ├ 내 밝은 앞날을 품으라고 한 사람

 ├ 내 앞날을 밝게 품으라고 한 사람

 └ …

 

말과 글에서는 오른날개와 왼날개를 나누는 일이 부질없습니다. 오른날개가 되든 왼날개가 되든 옳고 바르고 알맞고 쉽고 맑고 곱고 따뜻하고 넉넉하게 나누어야 할 말과 글입니다.

 

말과 글뿐이 아닙니다. 밥먹기에서도 오른날개와 왼날개란 따로 없습니다. 옳은 밥을 옳게 짓고 다듬어서 옳게 먹어야 합니다. 옷입기와 옷짓기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집짓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먹고 입고 마시고 자고 나누고 사랑하고 어깨동무하는 모든 자리에서, 그러니까 우리 삶자리에서는 오른날개와 왼날개란 하릴없는 금긋기입니다. 우리는 옳은 길을 걷고 옳은 삶을 꾸리며 옳은 터를 일구어야 할 뿐입니다.

 

옳은 삶에서 옳은 넋을 일구고 옳은 넋을 옳은 말로 담을 노릇입니다. 옳은 삶을 튼튼히 다지며 옳은 일을 찾고 옳은 놀이를 즐기며 옳은 사람이 될 노릇입니다. 옳은 삶을 바탕으로 옳은 사랑을 나누고 옳은 믿음을 가꾸며 옳은 나눔을 즐길 노릇입니다.

 

 ┌ 앞꿈 / 옛꿈

 ├ 앞길 / 옛길

 ├ 앞삶 / 옛삶

 ├ 앞일 / 옛일

 └ …

 

우리 스스로 제대로 헤아리지 않았을 뿐이지, "미래에 대한 비전" 같은 말마디를 우리 말로 단출하게 담아 보고자 했다면 '앞꿈' 같은 낱말을 빚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이루고 싶은 꿈이니 '앞꿈'입니다. 공공기관이든 진보 모임이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밝히고자 한다면 '앞길'을 이야기하면 됩니다. 이제부터 꾸리고자 하는 살림살이를 보여주고 싶으면 '앞삶'을 말하면 됩니다. 여태까지 한 일을 돌아보며 앞으로 할 일을 곰곰이 살펴서 알리려 한다면 '앞일'을 어떻게 마련하려 하는지 들려주면 됩니다.

 

옳게 말하는 말꿈을 살리고, 옳게 말하는 말길을 트며, 옳게 말하는 말삶을 일구고, 옳게 말하는 말일을 빛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ㄴ. 경제력 있고

 

..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는 실제 생활보다 강한 성 역할 고정관념에 따라 남자와 여자의 직업이나 관계를 표현할 때가 많습니다. 경제력 있고 남자다운 남자가 멋있는 남성으로 그려져요 ..  <권인숙-어린이 양성 평등 이야기>(청년사,2008) 48쪽

 

"실제 생활(生活)보다 강(强)한 성 역할(役割) 고정관념(固定觀念)"은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쏭달쏭입니다. "실제 삶보다 단단하게 굳어진 성 구실"로 고쳐 주면 될까요. "우리 삶과 달리 성 노릇이 굳어져 있어"로 고쳐써야 할까요. 한눈에 알아보기 좋도록 알맞게 가다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 보기글은 열서너 살부터 열예닐곱 살 푸름이한테 읽히는 눈높이로 쓴 책에 실려 있는데, 이렇게 글을 쓰면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길들거나 젖어드는 말투가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우리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읽히려는 글을 '아이들한테 먹이려는 밥'과 마찬가지로 잘 살피고 옳게 가누고 곱게 다듬을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의 직업(職業)"은 "여자가 하는 일"이나 "여자 직업"으로 손보고, '표현(表現)할'은 '나타낼'이나 '보여줄'로 손봅니다.

 

 ┌ 경제력(經濟力) : 경제 행위를 하여 나가는 힘. 개인의 경우는 보통 재산의

 │    정도를 이르고, 국가나 기업의 경우는 생산력이나 축적된 자본 따위를

 │    종합한 힘을 이른다

 │   - 경제력이 커지다 / 경제력이 집중되다 / 경제력을 과시하다

 │

 ├ 경제력 있고

 │→ 돈 있고

 │→ 돈 많고

 │→ 주머니 두둑하고

 └ …

 

경제 행위를 하는 힘이니 '경제력'이라고 적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경제 행위'란 무엇일까요. 돈을 쓰는 일, 돈으로 움직이는 일을 가리키지요? 그러니, 이 대목에서는 말뜻 그대로 '돈이 있고 없고'로 적으면 어떠할까 싶습니다. 돈이 있다면 돈이 많은 셈이고, 주머니가 두둑하다고 가리켜도 됩니다. 주머니가 넉넉하다고 적어도 좋으며, '잘산다'고 이야기해도 괜찮습니다.

 

 ┌ 경제력이 커지다 → 살림이 커지다

 ├ 경제력이 집중되다 → 경제를 꾸리는 힘이 모이다

 └ 경제력을 과시하다 → 살림새를 뽐내다 / 돈 많다고 자랑하다 / 돈힘을 으스대다

 

가만히 보면 '경제력'이니 '정치력'이나 '상상력'이니 '창의력'이니 하면서 '-力'을 뒷가지로 붙여 "어떠한 힘이 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힘이 있음을 가리키려 한다면 '-힘'을 붙이면 되건만, '경제힘'이나 '정치힘'이나 '상상힘'이나 '창의힘'처럼 쓰는 일은 드뭅니다.

 

밑말이 한자말일지라도 토박이말 '-힘'을 붙이면 되지 않을는지요. '독서력'이 아닌 '독서힘'이라 하고 '책읽기힘'이나 '책힘'이라 하면 넉넉하지 않을는지요. 꾸밈없이 말하면서 꾸밈없는 넋을 북돋우고, 수수하게 말하면서 수수한 넋을 사랑하며며, 조촐하게 말하면서 조촐한 마음밭을 가다듬으면 아름답지 않을는지요.

 

글 한 줄이 내는 힘이란 '글힘'입니다. '문장력'이 아닙니다. 내 생각에 담긴 힘이란 '생각힘'이고, 사람이 내는 힘은 '사람힘'입니다. 땅은 '땅힘'이고 하늘은 '하늘힘'이며 따뜻한 해는 '해힘'을 베풀어 줍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3.28 10:27ⓒ 2010 OhmyNews
덧붙이는 글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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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익히기 #글다듬기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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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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