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 없애야 말 된다 (304) 내적

― '내적 권위'와 '외적 권위'란 무엇인가 톺아본다

등록 2010.03.27 15:35수정 2010.03.27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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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적 권위

 

.. 하나는 그 사람이 가진 물리적인 힘이나 그에 대한 공포나 불안에서 비롯하는 권위이고, 또 하나는 인품이나 역량이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권위이다. 앞의 경우를 '외적 권위'라고 한다면 뒤의 경우를 '내적 권위'라고 할 수 있다 ..  <호리 신이치로/김은산 옮김-키노쿠니 어린이 마을>(민들레,2001) 18쪽

 

"그 사람이 가진 물리적(物理的)인 힘이나 그에 대(對)한 공포(恐怖)나 불안(不安)"은 "그 사람 주먹힘이나 나를 때리거나 못살게 굴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나 "그 사람이 힘으로 나를 괴롭히거나 들볶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으로 다듬어 봅니다. "인품(人品)이나 역량(力量)"은 "됨됨이나 슬기"나 "마음씨나 재주"로 손봅니다. "앞의 경우(境遇)를"은 "앞쪽을"로 손질하고, "뒤의 경우를"은 "뒤쪽을"로 손질해 줍니다.

 

그러나 이렇게 다듬으면서도 어딘가 어설프지 않느냐 싶습니다. 처음부터 썩 잘된 번역이 아닌 탓에, 이러한 번역을 살짝살짝 다듬는다고 해 보았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읽어내기 어렵습니다. 아예 통째로 고쳐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새로 번역을 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 사람이 주먹을 앞세워 나를 괴롭히지 않을까 두려워 하는 데에서 비롯하는 권위이고, 또 하나는 슬기롭고 훌륭한 매무새로 자연스럽게 빚어내는 권위이다. 앞쪽을 '겉힘'이라고 한다면 뒤쪽을 '속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애벌 번역을 한 다음, 글쓴이가 우리한테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지를 차근차근 살핍니다. 글 한 줄을 놓고 몇 날 며칠을 돌아보고 곱씹으면서, 이 한 줄이 사람들한테 어떤 느낌과 뜻으로 스며들면 좋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겉모양만 한글로 된 이야기가 아니라 속알맹이가 오롯이 살아 있는 우리 말이 될 수 있도록 온힘을 기울여 줍니다.

 

 ┌ 내적(內的)

 │  (1) 내부적인

 │   - 내적 원인 / 내적 변화 / 내적 구성원 / 내적 여건 / 내적인 구조 /

 │     내적인 연관성 / 이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내적인 것이다

 │  (2) 정신이나 마음의 작용에 관한

 │   - 내적 추구 / 내적 동기 / 내적인 경험 / 내적인 갈등 /

 │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

 ├ 외적(外的)

 │  (1) 외부적인

 │   - 외적 상황 / 외적 원인 / 외적인 조건 /

 │     내적 문제가 아니라 외적으로 심각한 사안이다

 │  (2) 물질이나 겉모습에 관한

 │   - 외적 충족 / 그는 정신적인 성장보다 외적인 욕구에 더 민감하다 /

 │     사람을 대할 때 외적인 면만 중요시해선 안 된다

 │

 ├ 내적 권위 → 속힘

 └ 외적 권위 → 겉힘

 

요즈음도 읽히거나 가르치거나 써붙여 놓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국민교육헌장'이라고 있습니다. 국민을 교육하는 헌장이라 하여 '국민교육헌장'일 텐데, 사람을 가르치는 다짐이라 한다면 '사람을 가르치는 다짐'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이 다짐말을 살펴보면 "안으로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이 나라 교육뿐 아니라 사회를 독재 올가미에 뒤집어씌운 이들이 내놓은 말마디에 '안으로'와 '밖으로'라고 적혀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 다짐말에는 '내적으로'와 '외적으로'라고는 안 적었습니다. "홀로 우뚝 서도록 매무새를 다스리고"라고는 안 적고 "자주 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라고 적었으면서, "모든 사람이 잘살 수 있도록 이바지할 때다"라고는 안 적으며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라고 적었으면서, 뜻밖에도 '내적-외적' 같은 말투는 끼어들지 않습니다.

 

 ┌ 이 문제의 원인은 분명히 내적인 것이다

 │→ 이 문제가 일어난 까닭은 틀림없이 안에 있다

 │→ 이 일이 터진 까닭은 틀림없이 우리한테 있다

 ├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

 │→ 속마음이 무르익은 사람

 │→ 속생각이 알찬 사람

 │→ 속이 꽉 찬 사람

 └ …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면 '내적'과 '외적'이라는 낱말을 실어 놓으면서 뜻풀이는 "내적 = 내부적인"이라 하고, "외적 = 외부적인"이라 해 놓습니다. 뜻풀이라 하기 어려운 뜻풀이인데, 뜻풀이에 딸린 보기글을 들여다보면, 거의 모두 '내부'와 '외부'로 고쳐 주면 넉넉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내부 원인-내부 변화-내부 구성원-내부 여건-내부 구조-내부 경험-내부 갈등"처럼 적으면 됩니다. "외부 상황-외부 원인-외부 조건"처럼 적으면 넉넉합니다.

 

다만, 모든 자리에서 '내부'와 '외부'로 다듬어 낼 수는 없습니다. 때와 곳을 살펴야 하고, 흐름과 느낌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덩그러니 몇 마디만 뚝뚝 잘라 놓은 보기글을 1:1로 어찌어찌 손질할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글월이 어느 자리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곰곰이 돌아보고 앞말과 뒷말을 나란히 살피면서 녹아내야 합니다.

 

 ┌ 외적으로 심각한 사안이다

 │→ 밖에서 보면 크나큰 일이다

 │→ 밖으로 크게 불거지는 일이다

 ├ 사람을 대할 때 외적인 면만 중요시해선 안 된다

 │→ 사람을 만날 때 겉만 보면 안 된다

 │→ 사람을 마주할 때 겉차림만 따져서는 안 된다

 └ …

 

처음 보기글을 돌아봅니다. 저는 제 깜냥껏 "내적 권위"는 '속힘'으로 손질하고, "외적 권위"는 '겉힘'으로 손질해 보았습니다. 한자말 '권위'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지만, "내적 권위-외적 권위"에서는 이대로 놓고는 도무지 풀어낼 길이 없다고 느꼈습니다. 아무래도 송두리째 새말을 짓지 않고서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길이 없구나 싶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우리 스스로 때와 곳과 흐름과 느낌을 살리는 새말을 즐겁게 짓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 슬기를 빛내며 새말을 일구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을 어루만지는 반갑고 싱그러운 새말을 만들지 않고 있습니다. 서로서로 오붓하게 나눌 만한 아름답고 알찬 새말을 가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한테 가장 알맞춤한 새말을 짓지 않기 때문에 자꾸자꾸 '내적-외적' 말마디가 퍼지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이웃과 살가이 주고받을 좋은 새말을 일구지 못하기 때문에, 예나 이제나 우리 말밭이 가난하고 우리 국어사전이 엉망진창으로 뒤처져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반드시 우리 말만 사랑해야 할 노릇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우리 이웃과 함께 우리 말을 알뜰살뜰 사랑하면서 다른 여러 가지를 나란히 사랑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사랑하지 않고 영어만 사랑한대서야 어떻게 한국사람끼리 한국말을 사이좋게 나눌 수 있겠습니까. 한국사람이 한국글을 야무지게 갈고 닦지 않고서야 어찌 한국 사회와 문화와 정치와 경제와 교육을 훌륭히 일굴 수 있겠습니까.

 

그냥저냥 쓰려 한다면 '내적'이든 '외적'이든 못 쓸 까닭이 없습니다. 쓰고 싶은 분들은 얼마든지 쓸 노릇입니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서 이렇게 바깥 말을 끝없이 들여온다면 우리 말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널리 헤아리지 않으면서 자꾸자꾸 바깥 말만 수없이 끌어들인다면 우리 글은 아름답게 거듭나지 못합니다.

 

 ┌ 속힘 / 속치레힘 / 속알힘 / 알맹이힘

 └ 겉힘 / 겉치레힘 / 겉껍데기힘 / 껍데기힘

 

더 나은 말을 찾고, 한결 알맞을 말을 캐내야 합니다. 국어학자들끼리 용쓰는 일이 아니라, 우리들 여느 사람들이 힘쓸 일입니다. 문득문득 떠오르는 느낌을 싱그럽게 살리면서 내 말마디와 내 넋과 내 삶을 살려 줄 노릇입니다. 겉치레가 아닌 속치레를 하면서 내 삶을 가꾸고, 겉모양이 아닌 속모양을 들여다보면서 우리 얼을 일굴 노릇입니다.

 

누구든 내 마음이나 입에서 저절로 쉽게 튀어나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아이들한테 한번 물어 보기도 하면서 우리 겨레 글 문화를 되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얘야, 속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힘은 무어라 하면 좋을까? 밖으로 드러나 우리 눈에 보이는 힘은 또 무어라 하면 좋을까?" 하고 물어 보면서, 아이들 풋풋하고 푸른 마음결을 믿어 보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3.27 15:35ⓒ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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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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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 #적的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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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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