묶음표에 갇힌 한자말 (56) 애가(哀歌)

[우리 말에 마음쓰기 893] '대로(對露) 전쟁'과 '러시아에 맞선 전쟁'

등록 2010.04.02 15:15수정 2010.04.02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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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애가(哀歌)

 

.. 남용되는 발명품과 박제화된 피사체를 위하여 애가(哀歌)를 부를 때가 되었다 ..  <전민조 엮음-사진 이야기>(눈빛,2007) 39쪽

 

'남용(濫用)되는'은 '함부로 쓰이는'이나 '마구 쓰는'이나 '잘못 쓰고 있는'으로 다듬어 봅니다. "박제화(剝製化)된 피사체(被寫體)를 위(爲)하여"는 "메말라 버린 피사체들한테"나 "딱딱하게 굳어 버린 사람들을 걱정하며"로 손질해 줍니다.

 

 ┌ 애가(哀歌)

 │  (1) 슬픈 심정을 읊은 노래

 │   - 인생의 애가, 마음 아프고 가슴 저린 그 무슨 노래를

 │  (2) 사람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

 │   - 맑은 목소리로 조상하는 애가를 부르게 하리라

 │  (3) [기독교] = 예레미야 애가

 │

 ├ 애가(哀歌)를 부를

 │→ 슬픈노래를 부를

 │→ 눈물노래를 부를

 │→ 눈물나는 노래를 부를

 │→ 눈물젖은 노래를 부를

 └ …

 

마땅한 노릇인지 모르지만, 우리 국어사전에는 '슬픈노래'나 '기쁜노래' 같은 낱말은 올림말로 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슬픈 노래'나 '기쁜 노래'처럼 띄어서 적어야 알맞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 말마디를 띄지 않고 싶습니다. 이만한 낱말이라면 기꺼이 새 낱말로 삼으면서 우리 말살림을 북돋울 때가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 느낌을 살찌우고 우리 생각을 일으키며 우리 마음을 촉촉히 어루만질 수 있는 낱말과 말투를 가꾸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이리하여, '슬픈노래-기쁜노래'를 새롭게 빚어내는 슬기가 있으면, '눈물노래-웃음노래' 같은 말마디를 새로 빚는 슬기로 이어집니다. 이 슬기는 '좋은노래-궂긴노래'로 이어질 수 있고, '밝은노래-어두운노래'로 이어지기도 하다가는, '새노래-옛노래'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 가슴아픈 노래를 부를

 ├ 가슴시린 노래를 부를

 ├ 가슴저린 노래를 부를

 └ …

 

저로서는 '가슴아픈-가슴시린-가슴저린'처럼 적어 보고 싶습니다. 이 말마디 또한 띄어서 적어야 올바릅니다. 그런데 왜 자꾸 우리 느낌 담아내는 말마디는 제대로 다루어지지 못하고 섬겨지지 못할까 궁금합니다. 아니, 우리들은 왜 우리 말마디에 우리 느낌을 살포시 실으며 슬기롭게 다루거나 알뜰히 섬기려는 마음을 키우지 못하는가 궁금합니다. '가슴아프다'라든지 '마음아프다'처럼 새 낱말을 일구는 마음밭이란 누구한테도 없는지 궁금합니다. '가슴저리다'처럼 살몃살몃 새 말틀을 짜려고 하는 생각밭이란 아무한테도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느 나라 말이든 안 그러겠습니까마는, 써야지 발돋움합니다. 꾸준히 써야 살아남습니다. 즐겨서 써야 아름답게 다시 태어나고, 신나게 써야 맑고 밝게 새로워집니다.

 

사람들이 한자를 자꾸자꾸 쓰기에 한자말이 자꾸자꾸 생겨납니다. 사람들이 알파벳이며 영어며 자꾸자꾸 쓰니까 알파벳으로 끄적이는 글과 이름이 자꾸자꾸 나타나고, 영어로 생각을 드러내는 일 또한 자꾸자꾸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는 동안 우리 말과 글로 우리 넋과 얼을 담아내는 일은 자꾸자꾸 줄어듭니다.

 

 ┌ 아픈 노래를 부를

 ├ 아프게 하는 노래를 부를

 ├ 구슬퍼 우는 노래를 부를

 └ …

 

좋은 뜻에서 일구었든 궂은 뜻에서 갈고닦았든 사진을 사진 그대로 받아들이거나 즐기는 사람들이 줄고, 사진 문화가 옅어진다는 걱정을 이 보기글에서도 읽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진만 이러하지 않습니다. 책마을도 그렇고, 학교도 그러하며 국회나 여느 회사나 관공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늘 쓰고 있는 말과 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다고 느끼는 노래를 부를밖에 없고, 아프다고 느끼는 그대로 노래를 부릅니다.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노래를 부르고, 아픔을 삭이는 가운데 눈물을 쏘옥 빼며 노래를 부릅니다.

 

 

ㄴ. 대로(對露)

 

.. 10년 후 일본은 대로(對露)전쟁을 일으킨다 ..  <가토 카즈오,카와타 이코이,토조 후미노리/최석두 옮김-일본의 식민지 도서관>(한울,2009) 187쪽

 

"10년(十年) 후(後)"는 "열 해 뒤"나 "열 해가 지난 뒤"로 다듬어 봅니다. "일 년"이나 "이 년"처럼 쓰는 일은 잘못이라 할 수 없지만, "한 해"나 "두 해"처럼 적어 줄 때가 한결 낫다고 느낍니다.

 

 ┌ 대로(對露) : x

 │

 ├ 대로(對露)전쟁을 일으킨다

 │→ 러시아한테 전쟁을 일으킨다

 │→ 러시아에 맞서 전쟁을 일으킨다

 │→ 러시아로 쳐들어간다

 │→ 러시아를 친다

 └ …

 

국어사전에도 없는 '대로'라는 낱말을 쓰니, 어쩔 수 없이 묶음표를 치고 '對露'를 적어 넣어야 합니다. 국어사전에 실려 있더라도 어려운 낱말은 묶음표를 쳐야 한다고 할 텐데, 묶음표를 치며 한자를 넣어야 하는 말을 놓고 우리 말이라고 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묶음표에 한자를 넣지 않고서는 알아들을 수 없다면 우리 말이 아니라고 여겨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는 토박이말도 매한가지입니다. 따로 묶음표를 치고 말풀이를 적어 넣어야 한다면 널리 쓰기에 알맞지 않습니다.

 

이 글을 옮긴 분은 왜 우리 말이 아닌 일본말 '對露'를 버젓이 살려 놓았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니, 일본책을 우리 말로 옮긴다고 한다면, 이 같은 일본말은 마땅히 우리 말로 옮겨야 할 텐데, 왜 이렇게 번역을 엉터리로 하고 말았을까 곱씹어 봅니다. 책을 낸 출판사에서는 왜 이러한 엉터리 번역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다듬지 못했을까요. 이런 글매무새로 책을 내놓으면, 이 책을 사서 읽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는지를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이런 말마디가 우리 말삶을 어지럽히고 있음을, 이런 말마디가 하나둘 모이고 늘면서 우리 말문화가 흔들리고 있음은 못 느끼고 있을까요.

 

 ┌ 열 해 뒤에 일본은 러시아한테 전쟁을 선포한다

 ├ 열 해 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하기로 한다

 ├ 열 해 뒤 일본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인다

 ├ 열 해 뒤 일본은 러시아로 쳐들어간다

 └ …

 

일본사람 눈으로는 "일본이 러시아한테 전쟁을 일으킨다"입니다. 러시아 쪽에서 헤아린다면 "일본이 러시아로 갑작스레 쳐들어왔다"입니다. 우리 쪽에서 본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가 보기에는 어떠한 모습인가요?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면서 글을 써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바라보면서 글로 담아내야 알맞을까요.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어떤 매무새로 펼쳐야 올바를까요.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4.02 15:15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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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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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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