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407)

― '강의 입구', '자연파괴의 대열' 다듬기

등록 2010.06.10 15:33수정 2010.06.10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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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강의 입구

 

.. 강의 입구에서 쏜살같이 내려가긴 했지만 지금껏 서너 명의 백인만 통과해 본 적이 있는 그 강 아래로 내려가기 전에 우리의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멈춰야만 했다 ..  <팔리 모왓/장석봉 옮김-잊혀진 미래>(달팽이,2009) 417쪽

 

'지금(只今)껏'은 '이제껏'이나 '여태껏'으로 손보고, "서너 명(名)의 백인만"은 "서너 백인만"이나 "백인 서넛만"으로 손봅니다. '통과(通過)해'는 '지나'나 '지나가'로 다듬고, "내려가기 전(前)에"는 "내려가기 앞서"로 다듬습니다. "우리의 놀란 가슴을 진정(鎭靜)시키기 위(爲)해"는 "우리들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려고"나 "우리 모두 크게 놀랐기 때문에 뛰는 가슴을 달래려고"나 "우리는 놀란 가슴을 다스리고자"로 손질해 봅니다.

 

첫머리에 나오는 "강의 입구"라는 말투가 가장 얄궂으나, 잇달아 나오는 "서너 명의 백인"하고 "우리의 놀란 가슴" 또한 몹시 얄궂습니다. 영어로 된 책을 한국말로 옮긴 분은 한국말을 제대로 할 줄 몰랐을까요. 아니, 한국말을 옳고 바르게 할 마음이 없었을까요. 말다운 말을 쓰고 번역다운 번역을 하겠다는 마음가짐을 먼저 세우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다 하여도 알맞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운 글 하나 여밀 수 없다고 느낍니다.

 

 ┌ 입구(入口) : 들어가는 통로. '들목', '들어오는 곳', '어귀'로 순화

 │   - 지하철 입구 / 극장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다

 │

 ├ 강의 입구에서

 │→ 강 들머리에서

 │→ 강어귀에서

 └ …

 

한자말 '입구'는 우리 말이 아닙니다. 그예 바깥말입니다. 더욱이 우리가 써서는 안 되는 한자말 가운데 하나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들어가는 통로"가 '입구'라고 되어 있는데, '통로(通路)'란 "통하여 다니는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통(通)하다'는 또 무엇인가 하면 우리 말 '이어지다'입니다. 그러니까, "이어져서 다니는 길"을 한자말 '통로'로 뒤집어씌운 셈이고, "이어져 다닐 수 있게 들어가는 길"이 '입구'인 셈입니다. 단출하게 적어 본다면, '길'을 한자말 '통로'로 적은 셈이고, '들어가는 길'이라 하면 될 말을 애써 '입구'로 적은 셈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더 살피면 '입구'라는 한자말은 '들목'이나 '어귀'로 고쳐써야 한다고 나옵니다. 이러한 풀이말대로, 우리 말은 '들목'이지 '입구'가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말은 '나들목'이지 '출입구(出入口)'가 아닙니다. 그런데, 이 나라 국어사전은 '입구'라는 한자말이 우리 말이 아니요, 반드시 고쳐써야 한다고 밝히면서 '출입구'라는 한자말은 아무렇지 않게 내버려 둡니다.

 

이 보기글만 살핀다면 보기글을 적바림한 번역쟁이 한 사람 말그릇이 얕다 할 텐데, 국어사전을 찬찬히 뒤적이며 보기글을 돌아보는 동안 번역쟁이 한 사람에 앞서 이 나라 국어학자부터 말그릇이 얕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우리가 늘 다루거나 주고받는 말글을 옳고 바르게 가다듬지 않는 국어학자들인데, 국어사전부터 엉망진창인데, 여느 번역쟁이 한 사람만 말그릇이 알차거나 아름답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 지하철 입구 → 지하철 어귀 / 지하철 나들목 / 지하철 들머리

 └ 극장 입구 → 극장 어귀 / 극장 들머리 / 극장 앞

 

오늘날 우리들 살아가는 곳은 거의 도시입니다. 도시에서는 자연과 마주하기 몹시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도 서울에서 가장 많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서울에는 크고 긴 물줄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나마 서울에는 국립공원 이름이 붙은 산에다가 한강까지 있다 할 텐데, 이렇게 산이 있고 물이 있어도 '강어귀'를 만나거나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생각하기 힘들 만큼 바쁜 도시살이입니다. 흐르는 물줄기를 느긋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우뚝 솟은 산을 넉넉히 보듬지 못합니다.

 

코앞에 있어도 코앞에 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곁에 있어도 곁에 있는 줄 헤아리지 못합니다. 이와 같은 우리 삶은 우리들이 늘 쓰고 있는 우리 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 아니라, 제대로 다스리거나 쓸 줄 모르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우리 둘레 숱한 이웃을 이웃 그대로 느끼지 못해요. 삶과 넋과 말이 모두 한동아리 흐름입니다. 우리들은 우리 삶과 넋과 말을 알차고 곱게 여미지 못하는 가운데 무엇엔가 휘둘리거나 이끌리듯 살고 있습니다. 살고 있다지만 겨우 목숨만 잇는 셈이고, 참되거나 착하거나 빛나는 매무새하고는 동떨어지고 있습니다.

 

말을 하며 말머리를 붙잡지 못하고, 글을 쓰며 글머리를 가누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며 사랑머리를 느끼지 못하고, 하느님이나 부처님을 믿으며 믿음머리를 가다듬지 못합니다. 일을 할 때에 슬기로운 일머리를 움켜쥐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놀이를 하며 참된 놀이머리를 껴안는 사람은 얼마나 되나요. 책을 읽을 때에는 책머리를 살피고 노래를 부를 때에는 노래머리를 되뇌일 노릇입니다. 삶을 꾸리는 우리들은 우리 삶머리부터 조촐히 다스려야 합니다.

 

 

ㄴ. 자연파괴의 대열

 

.. 부끄럽고, 염치없고, 바보스럽고…. 나는 아니야, 하면서 멀쩡하니 자연파괴의 대열에 끼어 있었습니다 ..  <풀씨> 두 번째 책(1999.여름.) 24쪽

 

'염치(廉恥)없고' 같은 낱말은 그대로 둘 때가 한결 나을까요? 저라면 이 낱말을 쓰지 않고 '뻔뻔하고'를 쓰겠습니다. 한자말 '염치'란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입니다. 그러니까 바로 앞에 '부끄럽고'라는 낱말이 나오니까, 이렇게 '뻔뻔하고'를 넣든지 '낯짝 두껍고'라든지 '얼굴에 쇠판을 깔았고' 같은 말마디를 넣을 때가 한결 잘 어울리지 싶습니다. '대열(隊列)'은 '사람들'이나 '무리'로 다듬어 줍니다. '자연파괴(-破壞)의'는 '자연을 무너뜨리는'이나 '자연을 때려부수는'이나 '자연을 망가뜨리는'으로 손질합니다.

 

 ┌ 파괴(破壞)

 │  (1) 때려 부수거나 깨뜨려 헐어 버림

 │   - 파괴 본능 / 파괴 행위 / 살육과 파괴는 전쟁이 지닌 전쟁 원래의 속성

 │  (2) 조직, 질서, 관계 따위를 와해시키거나 무너뜨림

 │   - 환경 파괴 / 생태계의 파괴 / 그것은 가정의 파괴라고 한마디로 얘기했다

 │

 ├ 자연파괴의 대열

 │→ 자연을 파괴하는 대열

 │→ 자연을 부수는 사람들

 │→ 자연을 망가뜨리는 사람들

 │→ 자연을 짓밟는 무리

 └ …

 

한자말 '파괴'를 풀이해 놓고 있는 국어사전을 들여다보며 생각합니다. "생태계의 파괴"와 "생태계 파괴"는 어떻게 다를는지 궁금합니다. "환경 파괴"와 "환경의 파괴"는 어떻게 다르고, "가정의 파괴"와 "가정 파괴"는 또 어떻게 다르려나 궁금합니다. 토씨 '-의'를 붙일 때하고 붙이지 않을 때하고 어떻게 다른지 궁금합니다.

 

'-적'을 붙인다고 뜻이 더 깊어지지 않듯이, '-의'를 붙인다고 쓰임새가 넓어지거나 글이 부드럽게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한자말 '파괴'를 쓴다고 한결 웅숭깊지 않으며, 토박이말 '부수다'나 '허물다'나 '망가뜨리다'나 '짓밟다'를 쓴다고 어딘가 모자라거나 어설플 까닭이 없습니다.

 

그래도 '파괴'라는 한자말을 좋아한다면 "자연을 파괴하는 대열"처럼 적어 볼 수 있겠지요. 적어도 토씨 '-의'는 홀가분하게 털어내면서.

 

여기에서 한 번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으면 "자연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쯤으로 손볼 수 있고, 두 번 세 번 더 마음을 쏟을 수 있으면 내 나름대로 내 말투를 살가이 이룰 수 있습니다.

 

 ┌ 자연을 어지럽히는 사람들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 자연을 더럽히는 사람들과 한통속이었습니다

 ├ 자연을 괴롭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였습니다

 └ …

 

우리는 반드시 바르고 고운 말만 써야 하지는 않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굳이 얄궂고 뒤틀린 엉터리 말을 써야 할 까닭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바른 말이라 한다면 무엇이 바른 말일까요. 고운 말이라 하면 어떠해야 고운 말일까요. 틀에 박히거나 딱딱하거나 메마른 말이 바르거나 고운 말은 아니겠지요. 사랑스러우며 믿음직할 뿐 아니라 싱그럽고 좋은 말이 바르며 고운 말이 아니겠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사랑스레 돌보며 바르게 말하면 됩니다. 우리는 우리 넋을 따스하게 어루만지며 곱게 글을 쓰면 됩니다.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누리집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cafe.naver.com/hbooks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2010.06.10 15:33 ⓒ 2010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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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 글쓴이가 쓴 ‘우리 말 이야기’ 책으로,
<생각하는 글쓰기>(호미,2009)가 있고,
<우리 말과 헌책방>(그물코)이라는 1인잡지가 있습니다.
#-의 #토씨 ‘-의’ #우리말 #한글 #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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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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