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71회)

미인도(美人圖) <3>

등록 2010.09.14 11:13수정 2010.09.1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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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혜원의 그림 속에 나오는 여인은 여럿이지만 어쩌면 아주 적은 숫자일 수 있었다. <미인도>에 나오는 여인의 자태가 예사롭지 않은 반면 <송낙(松絡)>은 전연 다른 형태의 구도인데도 의심쩍은 바가 한둘이 아니었다.

'그림 속엔 정순왕후가 있다.'


혜원이 생각하는 건 이것일 것이다. 내명부의 최고 어른이 기녀 복색을 하는 것도 의심스러운데 궁인을 내보내 한량들의 노닥거림을 받게 했다면 그 저의는 무언가. 자신의 행위를 감추려는 특별한 의도가 있다는 건가?

산홍이 돌아간 후에도 정약용은 살인 현장에서 떼어 온 <송낙>이란 그림에 몰두했다. <송낙>과 함께 근자에 그린 것으로 보이는 <월하정인>도 함께 펼쳤다.

남녀가 조심스럽게 만나고 있는 담벼락 곁엔 양반인 듯 잘 차려입은 사내가 길을 재촉하고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이 주저하는 기색으로 서 있는 모습이 혜원에겐 어떤 모습으로 비춰졌을까. 약간은 조소를 담은 화제(畵題)가 붙어 있다.

달은 기울어 밤 깊은 삼경인데(月沈沈夜三更)
두 사람 마음은 두 사람이 안다(兩人心事兩人知)

그림이 여러 폭이다 보니 어느 게 정순왕후를 그린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웠지만 정약용은 <송낙>이란 풍속화를 보며 혜원을 만나봐야 될 것을 재삼 느꼈다. 길을 나서자 서과가 한소리 내놓는다.


"나으리, 산홍이가 돌아가며 말하길, 지금쯤 삼화루에 그 화원이 올 것이라 했습니다. 지금 가시면 만나실 수 있겠습니다."

삼화루는 도화서에서 멀지않은 곳이니 일각(一刻) 어림이면 갈 수 있었다. 길을 가면서 생각하니 이 일은 결코 간단한 게 아니었다. 중신 몇 사람이 삼화루 벽에 붙은 그림에 대해 알았지만 크게 내색하는 눈치가 아닌 것은, 그림 속 여인이 뜻밖의 인물이기 때문이었다.


내명부 최고 어른은 선대왕의 비(妃) 정순왕후다. 쓰개머리를 한 채 송낙을 옆구리에 끼고 조바심치는 모습이지만 기본 뼈대가 있다 보니 자신이 그린 미인도와 일치된 부분이 적지 않음을 혜원은 알아차린 것이다.

밑그림을 그리면서 선의 약함과 깊음을 볼 때 한 번은 자신이 붓질한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린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정순왕후께서 주위를 속이고 기녀들 옷을 입은 채 그림을 그리게 한 건 무슨 뜻인가. 세상에 대해, 아니 자신에 대해 좀 더 속이고 싶은 그 무엇이 있는 걸까.'

혜원은 고개를 저었다. 생각해 보면 정순왕후는 열다섯 살 때 선대왕에게 시집 온 탓에 오라버니 김귀주가 음서(蔭敍)로 벼슬길에 나갔다.

선대왕 때도 문주회(文酒會)란 모임이 있었다. 회원들은 문관들이지만 다들 과거 합격자는 아니었다. 이들 중엔 음서로 벼슬길에 나온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에겐 '대인'이란 호칭을 썼다. 과거를 통해 나온 사람들을 '선생'이라 부르는 것과는 차이가 있었다.

음서로 나온 사람들은 사헌부를 비롯해 사간원, 홍문관 등의 청요직(淸要職)엔 기용되지 않았으나 선대왕은 예순 여섯에 어린 아내를 맞은 즐거움에 김기주를 사간원 정원에 법도를 무시한 벼슬을 내렸었다.

선대왕이 세상을 떠난 후 정순왕후의 일상은 어떤 변화가 있었는가? 깃털 빠진 메추라기 같은 벽파(僻派)의 중신들을 만나는 것 외엔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다. 그 무렵 상련(賞蓮)이란 궁인이 뜻밖의 말을 내놓았다.

"대비마마, 궁밖에 한 번 나가시지요."
"궁밖엔 왜?"

"마마를 찾아오는 이는 한결같이 힘을 잃은 중신들이 아닌지요. 자신들 힘이 넘칠 때는 기방이니 어디니 온갖 저희들 즐기는 일에만 몰두하다 힘이 다해 나락으로 떨어지면 어떻게든 살아나려고 마마를 찾아오는 것 아닙니까."

"그렇게 보이느냐?"
"마마, 피어나는 꽃처럼 마마는 곱습니다. 꽃이나 달은 찾아주는 사람이 있어야 더 값어치가 있는 게 아닌가요?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깊은 산중의 꽃이나 구중궁궐에 갇혀있는 마마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네 말이 맞다."
"소인이 소격서에서 마마를 따라 궁에 들어왔지만 가끔 그곳 생활을 잊지 못합니다."
"잊지 못할 일이 있느냐."

"그곳 가까이 보림원이 있사온데 무애(无涯)라는 이름의 스님이 있습니다. 중년을 훌쩍 넘어섰는데 낯빛은 어린애같이 맑아 장안 사대부가의 여인들이 공 들이러 오는 걸 보았나이다. 스님께선 글자 쓰는 데도 불력(佛力)이 뛰어나 서예를 익히는 사람들도 많아 찾아옵니다. 마마."
"어찌 그러느냐."

"쇤네도 예전에 스님의 설법을 들으려 보림원을 찾아갔사온데 아주 영검한 능력으로 쇤네를 치료해 주었나이다. 마마도 한 번 찾아가 보시지요. 쇤네가 먼저 기별을 놓았습니다."

그렇잖아도 궁에 처박혀 답답한 마음 풀길 없었는데 참으로 잘 된 일이었다. 스님을 만나 대화하고 세상 돌아가는 얘길 나누다 돌아오면 궁 밖의 나들이는 그것으로 족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자신의 주변에 이상한 기미가 느껴졌다. 자신과 함께 이곳에 온 궁인이 섬뜻한 말을 하는 게 아닌가.

"마마, 언제부터인지 마마의 나들이 행차에 이상한 사내가 따라붙는 것 같습니다."
"이상한 사내라니?"

"그림 그리는 화원인듯 싶습니다. 마마, 그 사람들을 바짝 흥이 나게 해줄까요?"
"그게 무슨 말이냐?"

"마마께서 직접 그림 속 여인이 되는 것이지요."
"그러다 상감이라도 아는 날엔···."

"그건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장차 선대왕의 제례(祭禮) 그림을 위해 마마께서 직접 화원들의 능력을 시험했다고 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마마, 뒷감당이 어려운 일이 생길 지 모르시오면 형조좌랑 영감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나가시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니다. 쇤네는 다음에 <월하정인>을 만드신다면 얼마나 마음이 두근거리겠나이까."

"일종의 놀이로구나."
"예에 마마. 쇤네가 보림원 집사에게 들은 얘긴 혜원 신윤복이란 화원이 마마의 모습을 그리더라고 합니다. 초벌을 그리고 다시 손질하기 위해 자주 나타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상련(賞蓮)이 네가 먼저 나가 한량들과 유희를 즐기는 게 좋겠다. 그 자리에 아예 그 화원을 부르거라. 그 다음에 나는 <미인도>를 그릴 것이다. 이번 일은 형조좌랑 영감에겐 알리지 말거라."

일은 은밀히 진행됐으나 혜원은 아주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자세히 그려나갔다. <미인도>를 그리고 <송낙>을 그렸을 때 칠서(七鼠)가 초벌 그림을 가지고 와서 정순왕후 친척이라는 김씨를 만난 것이다. 이 날 김씨는 반촌에 사는 채직동과 술자리를 하는 중이었다. 칠서는 멋대로 떠들었다.

"내가 이 그림을 보아하니 영락없이 대비마마가 분명하네. 내명부의 최고 어른인 그 분이 무슨 연유로 기녀 복장을 하고 쓰개머리를 한 채 무애 스님의 거처인 보림원을 찾아간단 말인가. 이게 세상에 알려지길 바라는가? 아니면 나와 흥정을 한텐가?"

"그 그림을 주게. 그림이 초벌지 같으니 내가 그걸 대비마마께 보이고 자네가 원하는 재물을 주겠네. 어떤가, 그리하겠는가?"

칠서는 자신의 생각대로 됐다는 생각에 조금도 의심없이 물러섰다. 이 일은 정순왕후에게 알리기 전 급히 형조좌랑 오경환에게 전해졌다.

"대비마마가 무슨 생각에서 이 같은 일을 하셨는지 모르나 이렇듯 그림이 그려지고 있으니 두고만 볼 수 없네. 아무래도 그 자의 명을 취하는 게 좋겠어."

그렇게 돼 칠서는 칼에 맞아 삼화루 담벽에 기댄 체 명이 끊겼다. 오경환은 삼화루를 떠나기 전 <송낙>이란 그림을 벽에 붙인 채 유유히 사라졌다. 그것은 요망한 그림을 그린 화원이 있다는 걸 천하에 알리려는 의도였다.

정약용이 삼화루에 당도하자 방 안엔 혜원과 어떤 사내가 앉아 있었다. 홍의(紅衣)를 입은 것으로 보아 별감(別監)이 분명해 보였다. 삶지 않은 명주실로 짠 옷 안엔 '숙초창의'를 받쳐 입었다. 창의는 통소매에 양 옆을 튼 보통 사람들의 나들이 옷이다. 얘길 다 나누었는지 사내는 거만스럽게 자리를 털고 일어나 횅하니 나가버렸다. 혜원에게 자초지종을 들은 정약용은 곧 상감께 차자(箚子)를 올렸다.

<전하, 신 정약용 돈수백배하여 아뢰옵니다. 항간에 떠다니는 그림은 여러 풍설이 따르옵니다만 그 사실을 확인할 길은 없나이다. 다만, 이 일이 대비마마와 관계 있사오니 전하께오서 직접 처리하심이 옳다고 보옵니다.>

[주]
∎일각(一刻) ; 15분
∎차자(箚子) ; 간이 상소
#추ㅜ리, 명탐정,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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