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추적의 명탐정 정약용(101회)

살(煞) <1>

등록 2011.01.04 09:32수정 2011.01.04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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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은 구름이 걸린 하늘 숲에서 얼굴을 내민 채 자박자박 걸어가는 두 여인의 자태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좋이 쉰은 넘어뵈는 곰보 아낙 옆으로 투박한 걸음을 옮기는 이는 장옷을 둘러쓰고 얼굴을 겨우 내놓았으나 어딘가 모르게 강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바람이 휘이 불어오자 초목이 흔들리는 소리가 우수수 수런대며 휘파람새처럼 자지러졌다.

"나으리, 아직도 물웅덩이에 사체가 있나이다."
"석 달이 지났는데 요망한 계집이 바람 냄샐 맡고 있는가?"
"어찌할까요?"


"모레쯤이면 전하가 납실 것이니 치워야겠지."
"아, 예에."

주검(屍)은 이제 스물이나 됐을까 싶은 나이 어린 계집이었다. 두 여인은 잠깐 망설이더니 이내 동교(東郊)의 금리에게 사실을 알렸다.

살꽂이벌에 마방(馬房)을 열다 보니 무예겨루기를 앞두고 예저기 금리들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을 통해 중앙으로 보고된 젊은 계집의 변사는 사헌부의 서리배들이 출동하고서야 한결 팽팽해졌다. 원신인(元申人)으로 나선 곰보 아낙은 사체를 처음 보았을 때의 상황을 혀끝에 올렸다.

"오늘은 칠석제(七夕製)를 치르는 날이라 도성에 구경 가려고 나서는 길이었습니다. 팔도 거자들을 보려는 설레임에 들떠있는데 한밤에 사체를 보고 얼마나 질겁했는지 모릅니다."

이곳 살꽂이벌은 중량천과 한강이 합류하는 중간지점이다. 그 중간이 '곶(串)'을 이루어 전관평이니 전교(箭郊) 또는 동교(東郊)라 불렀다.


주검이 있던 물웅덩이 근처엔 풀과 버들이 무성해 보통 때라면 말들이 무리지어 풀 뜯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선의 국왕이 직접 나와 승천하는 황룡이 수놓인 독기(纛旗)를 꽂은 채 사냥을 즐기던 곳이니 인가라곤 휘이 둘러봐야 손가락을 꼽을 정도였다.

금리들이 마른 땅에 여인의 주검을 올리자 서과가 앞으로 나섰다. 사이를 뚫고 정약용의 물음이 화살처럼 꽂혔다.

"익사체로 보이는데 어떠냐?"
"물에 잠긴 지 오래 돼 시신이 팽창했으나 바람과 햇빛을 쏘여 쉽게 부식됐습니다. 죽은 원인을 밝혀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흐음. 그렇다 하나 보고서는 작성하거라."

서과는 곧 검시 보고서를 작성했다. 오랫동안 물에 잠긴 탓에 주검은 크게 문드러져 치사에 이른 원인은 찾지 못한 상태였다.

<머리털이 빠지고 얼굴과 눈이 부풀어 올랐으며 입과 입술은 뒤틀려 벌어졌다. 머리와 얼굴을 비롯해 온 몸의 피육이 한결같이 푸르고 검은 데다 피부는 벗겨진 상태다. 시체를 검험하니, 우물이나 강에서 죽은 뒤 물에 잠긴 채 여러 날 지나 버려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사체의 속곳에 놓인 사방이 막힌 벙어리 저금통이 있다는 점이다. 별다른 상흔이 없는 것으로 보아 억울한 죽음일 공산이 크다.>

주검이 달구지에 실려 관아로 옮겨지는 걸 보며 정약용은 벙어리 저금통 밑바닥에 쓰인 글귀를 떠올리며 가만히 뇌까렸다.

'막비천운(莫非天運)이라.'

이것은 조선의 창업을 이룬 이성계가 자신의 아들 태종을 죽이지 못해 탄식하던 말이었다. '아, 천운이구나.' 하는 이 말은 사랑하는 아들 방번과 방석 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은 둘째아들 태종을 미워하던 이태조의 탄식이었다.

그 후 함경도 땅 함흥에 이태조가 칩거해 버리자 보다 못해  박순(朴淳)이 자원했다. 새끼 딸린 어미 말을 끌고 별궁근처에서 새끼를 풀어 울게 한 후 복명했다.

"어미를 따르는 말도 저러한 데 하물며 사람인들 부친에 대한 정이 없겠나이까. 전하, 어서 한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의 정성에 감동한 이태조가 돌아오자 차일을 치고 맞이한 곳이 이곳 살꽂이벌이었다. 주위사람들이 경하의 말을 올렸으나 하륜은 큰 차일 밑에 굵고 높은 기둥을 세웠다.

하륜의 예측대로 이곳에 당도한 태조는 별안간 화살을 태종에게 쏘아 장내를 긴장시켰다. 기둥 뒤로 몸을 피해 위기를 넘긴 태종이 부왕에게 술잔을 올리는 순서가 됐을 때, 하륜이 중간 신하에게 잔을 바치게 하자 이태조가 탄식한 것이다.

'막비천운, 아무리 원수같은 자식을 살해하려 해도 하늘의 운을 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는 탄식 아닌가.'

결국 이태조는 옥새를 꺼내 태종에게 던질 수밖에 없었다. 부자 간이였지만 그것이 정적일 때는 가차없이 칼을 휘두른 게 왕실의 법도였다.

살꽂이벌은 그 후 이성계를 사냥개처럼 따르며 정적을 모살했던 이씨들의 친위부대 별시위(別侍衛)가 머물렀다. 살꽂이벌 이곳저곳에 가옥들이 보이는 건 삼군녹사(三軍綠事) 전사영(田仕潁)의 후손들이 머무는 거처로 그들은 사람이 없는 곳에 모여 살며 좋은 시기가 무르익길 기다렸다.

"자네 집안엔 서기가 있네. 만질 수 없는 태운(胎運)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건 보거나 들을 수 있지만 만질 수 없는 연기같은 것이지. 왕씨를 버리고 성을 바꾼 건 오랫동안 자네 혼자 살자는 것이 아님을 우리들은 아네. 이성계가 공업을 쌓았지만 결과는 칼날에 묻은 꿀이잖은가. 핥으면 핥을수록 죽음이 다가오는 걸 이씨들은 모르네. 그러니 자네가 이왕실의 자궁(子宮) 깊숙이 들어가 있으면 자네 후손들이 잃어버린 왕씨의 세상을 찾으리라 보네."

서운관의 왕태사(王太史)는 고려가 무너질 때 '호랑이 발톱' 노리개를 삼군녹사에게 선물했었다.

"천하는 이씨들 세상이네. 왕씨 성을 쓴다는 것만으로 목을 치고 있으니, 자네가 전씨(田氏)로 성을 바꿨으니 때가 무르익길 기다려야 하네."
"언제까집니까?"

"이씨들은 역성혁명(逆姓革命)으로 피를 불렀으니, 권좌를 탐낸 그들은 장차 부모 형제간에 칼부림 할 것이고 제 형제 죽이길 밥 먹듯 할 것이야. 때가 되면 자네 힘이 크게 소용될 날이 올 것이네."

왕태사는 '호랑이 발톱' 노리개와 물건을 적은 얇은 단자(單子)를 건네며 목소릴 낮추었다.
"그때가 언제인진 나도 모르네. 하늘과 땅의 운수를 살피는 내가 이런 말을 하니 실소가 터질지 모르나 천운은 점괘 상으로 나타나지 않으니 짐작만 할 뿐이네. 자네 때가 아니라 자네 아들 때일 수도 있고 그보다 더 먼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날 수도 있네. 분명 그때는 '호랑이 발톱' 노리개를 들고 자네 집안을 찾아온 사람이 있을 것이네."

순식간에 전사영의 시대는 지나가고 그의 아들 시대도 흘러갔다. 조정에선 형제간에 피를 부르는 일이 생기고 백년이 흐르고 4백년이 흐른 동안, 숙부가 조카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여도 조용하더니 정조 15년의 칠석제(七夕製) 알성시가 열리는 밤, 뜻밖의 물건이 나타난 것이다.

죽은 자의 주변을 살피던 서과는 양쪽 귀가 달린 벙어리저금통을 찾아내 흙을 털어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으리, 이건 뭔가요? 죽은 아낙이 지닌, 동전 넣는 저금통으로 보입니다만."

정약용은 그걸 받아 눈높이로 올렸다. 그것은 벙어리 저금통과 흡사한 '아도(啞陶)'란 물건이었다.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정도전과 무학은 같은 의견을 내놓았었다.

"한양은 풍수상 좋은 땅이나 좌우 산천이 아성다출형(啞聲多出形)이니 도성 안에 농아자가 나올 공산이 크다. 한양이 신도(新都)가 되면 농아자가 나오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한강촌에 아도점(啞陶店)을 만들어야 한다."

아도점은 '아도'의 제조소를 뜻한다. 모양을 보면 일종의 벙어리 저금통으로 구슬처럼 생겼지만 귀가 좌우에 붙어있고, 길이는 한 치 반 푼에 폭이 한 푼으로 동전 넣는 구멍밖에 없는 항아리다.

이 항아리에 많은 동전을 넣으면 그것을 깨뜨려야 꺼낼 수가 있다. 다시 말해 '아도'는 동전을 먹으면 죽을 때까지 토하지 않는다는 걸 상징적으로 나타냈다. 귀가 있어도 소리를 듣지 못하는 건 농아자의 모습과 닮아 아도를 만듦으로써 풍수상 나타날 수 있는 좋지 않은 기운을 물리친다고 믿었다.

조선의 개국 초에 나타난 물건이 그것 하나뿐인가. '호랑이 발톱'도 있었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호랑이 발톱은 고려가 붕괴될 때 부흥 운동을 일으키는 자들이 거사 자금이 숨겨진 장소를 기록한 단자(單子)와 함께 있었다.

가장 합당한 시기에 삼군녹사를 지낸 전사영(田仕潁)의 후손들이 일어선다고 했는데 그의 행처에 대해선 알 수 없었다.

살꽂이벌에서 발견된 주검에서 '아도'가 나왔으니 긴장이 되는 건 당연했다. 또한 스물 쯤의 처녀가 입고 있는 옷가지가 일반인들이 입는 옷이 아니라 궁중복식으로 판단돼 검시를 하는 서과로선 상당히 곤혹스러웠다.

관아에 돌아온 정약용은 '아도'를 손바닥에 올린 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조선이 들어선 개국 초엔 한양에 도읍지를 열면 벙어리가 많아진다는 이유로 만든 비방이 '아도'였다. 칠석제가 끝나고 급제자가 발표되면 예전과 같이 전하께선 살꽂이벌에 납시게 되어 있다.

'전하의 행차가 칠석제를 치르면 살꽂이벌에서 무예겨루기를 할 것인데 행사가 있기 닷새 전, 궁인들은 나가서 준비를 할 것이다. 아니 벌써 그곳에 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아는 누군가가 여인의 주검에 '아도'를 놓아뒀으니 이건 막비천운을 내세운 역모와 상관있는 게 아닌가.'

아닌 게 아니라 그 시각 살꽂이벌의 마방(馬房)엔 괴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곰보아낙은 자신의 서방이 간밤에 들려준 말을 떠올리며 군침을 삼키며 달금진 말을 혀끝에 올렸다. 그녀 앞엔 장옷을 걸친 중년 여인이 걷고 있었다.

"소인은 왕실을 출입하는 보따리장수로 나약한 서방과 가정을 꾸려왔습니다만, 며칠 전 힘없고 맥 빠진 서방이 정색을 하고 나를 부르더니 민화(民畵) 하날 떠억 걸고 그런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평소 하는 일이 그림 그리는 일인지라 사람들은 듣기 좋으라고 화원이라 부릅디다만 그림을 그려 보리쌀 한 됫박 가져온 일이 없고 보니 그런 호칭은 당찮은 것이지요."

그런데 지난밤엔 여인의 서방이 백미 두 섬을 가져 와 뜻밖의 말을 하더란 것이다.
"나도 자세한 건 모르니 임자가 물어도 말해 줄 게 없네. 상감의 행차가 내일 쯤 살꽂이벌에 이르러 무예겨루기를 할 것이니 행사가 있기 전 궁인들이 나가 준비할 것이네. 자네가 살꽂이벌에 사는 삼군녹사의 후손들이 사는 곳을 찾아가 '호랑이 발톱 노리개'를 보여주면 누군가 자넬 따라 나설 것이네. 그 자를 데리고 청실과 홍실을 엮어 세운 마방(馬房)으로 인도하게. 자네 소임은 거기까질세. 일이 잘 되면 우리에게 부귀영화가 찾아올 거네."

그래서인지 곰보아낙은 불쑥 고개를 들어 휘둘렀다. 벌써 살꽂이벌 일대는 말과 관병들의 소란스러움이 가라앉아 있었다. 궁에서 나온 일행들은 끌고 온 말을 단속해 침방을 마련했는데 그곳 어디에 청실과 홍실을 엮은 깃대를 세워놓았다는 것이다. 궁인들 처소니 출입하는 건 여인뿐이어서 낯선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신경이 곤두 선 무예별감의 눈초리가 예리하게 팔랑거렸다. 곰보아낙이 입을 열었다.

"거의 다 왔습니다. 어른께서도 보다시피 깃대에 걸린 치마 옆으로 청실과 홍실이 보이지요? 바로 저곳입니다. 여장(女裝)을 했으니 다소 불편해 보이지만 그리해야 사람들 눈을 속일 수 있으니 부득이 합니다. 어른께선 문밖에서 낮은 기침을 세 번 하시면 됩니다."

안내하던 곰보 아낙이 자취를 감추자 여장을 한 사내는 문밖에서 낮은 기침을 큼큼거렸다. 그것을 기다린 것일까.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며 빨리듯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문밖이나 별반 차이가 없었다. 손으로 더듬어야 무엇인지 알 수 알 수 있도록 어둠은 눈밑까지 내려와 있었다. 그 어둠 속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야릿하게 들려왔다.

"향을 피우겠습니다."
화섭자 당기는 부스럭거림이 일어나더니 매캐한 훈향이 코 끝에 날아들었다.
"비봉첩(飛鳳帖)을 풀었습니다."

일종의 음향이었다. 사내의 힘을 느끼고 싶은 여인이 약재의 힘을 빌어 봉황이 나는 즐거움을 누리는 비방이 비봉첩이다.

흔히 이것을 봉황이 함께 난다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허약한 사내의 힘을 단단하고 줄기차게 만들기 위해 피우는 음향이었다. 비봉첩은 여염집에서 쓰는 게 아니라 궐 안에서 쓰던 물건이었다.

[주]
∎단자(單子) ; 물건의 수량을 적은 종이
∎원신인(元申人) ; 사고를 처음 목격한 자
∎독기(纛旗) ; 어떤 행사를 치를 때 꽂는 깃발
#추리,명탐정,장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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