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시대의 백정조합인 형평사(衡平社) 대표단이 일본의 천민운동단체인 전국수평사(全國水平社, 젠코쿠스이헤이샤)를 방문해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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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비해, 노비는 외형상으로는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노비의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했고, 상업이나 수공업에도 종사했다. 외형상으로는 농민·상인·수공업자의 모습을 띤 것이다.
이익의 <성호사설> 권7에 따르면 노비 시인 백대붕처럼 문단에서 활약하는 선비 스타일의 노비도 적지 않았고,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따르면 학생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사회적 존경을 받는 노비들도 있었다. 농공상(農工商)뿐만 아니라 사(士)를 업으로 하는 노비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소수 혹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노비는 농공상에 종사했다.
법적으로 타인에 예속돼 천대를 받았던 노비조선시대 전체 인구에서 노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최하 30~40% 이상인 데다, 겉모습 또한 일반인들과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노비와 양인 등을 분간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노비는 가장 일반적인 노동자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의 평균적인 샐러리맨과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노동자가 GNP의 대부분을 책임지고 있다면, 과거에는 노비가 그런 역할을 수행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간에, 이들은 법적으로 남에게 예속된 사람들이었다. 설령 서당에서 훈장 일을 하는 노비일지라도, 그는 정기적으로 주인을 찾아가 신공(공물)을 납부해야 했고 또 주인의 판단에 따라 매매나 상속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노비는 겉모습이나 직업이 천해서가 아니라, 법적으로 타인에게 예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사회적 천대를 받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직업이나 옷차림·주거지만 놓고 보면, 노비가 백정보다 더 나은 처지에 있었다. 노비는 양인과 거의 구분되지 않은 데 비해 백정은 확연히 구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길거리에서 노비가 백정을 놀릴 수는 있어도 백정이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백정이 보기에는 누가 노비이고 누가 양인인지 식별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노비는 공인된 직업에 종사한 데 비해 백정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노비와 백정이 서로 상대할 때는 아무래도 노비가 우위에 설 수밖에 없었다. 법적으로는 백정이 나았지만, 현실적으로는 노비가 나았던 것이다.
만약 관리직에 종사하는 노비를 상대할 경우, 백정은 그런 노비를 하늘처럼 떠받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노비들은 오늘날의 대기업 이사에 못지않은 파워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비와 백정이 싸우면, 국가는 누구 편을 들까조선 전기에 홍문관 부제학(차관보급)을 지낸 이맹현(1436~1487)의 가문에는 752명의 노비가 있었다. 태조 1년 8월 20일자(1392년 9월 7일) <태조실록>을 보면, 1천 명 정도의 노비를 보유한 가문들도 꽤 있었다. 이런 기업형 가문에서는 노비 간에 서열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고, 그중 상층부는 여타 노비와 확연히 구별되는 사회적 지위를 누릴 수밖에 없었다.
또 관청에도 수노(首奴)라는 노비가 있어 여타의 노비들을 관장했다. 이런 수노들은 스스럼없이 관청 고위직 인사들을 상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웬만한 양인들은 그들을 상대할 수조차 없었다. 백정이 이런 관리직 노비에게 "나는 그래도 양인인데"라며 거드름을 피울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