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성술, 흑마술, 점묘법...이거 추리소설 맞아?

[리뷰] 오구리 무시타로 <흑사관 살인사건>

등록 2012.01.10 10:43수정 2012.01.10 10:43
0
원고료로 응원
a

<흑사관 살인사건> 겉표지 ⓒ 북로드

추리소설을 구분하는 기준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로 '가독성'을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잘 읽히는 추리소설'과 '안 읽히는 추리소설'로 나누어 보는 것이다.

잘 읽히는 추리소설은 문장구조가 쉽고 단어도 평이할 가능성이 많다. 범인이 복잡한 트릭을 사용하지도 않고 등장인물이 심오한 사상을 설파하지도 않는다. 그냥 A부터 시작해서 Z까지 한눈 팔지 않고 일직선으로 읽어나가면 된다.


반면에 안 읽히는 추리소설은 위와는 반대의 특징을 가졌다. 희귀한 용어와 학문이 등장하고 이야기 전개는 자꾸 옆길로 빠지고 주인공(그중에서도 탐정)이 툭하면 엄청난 장광설을 늘어놓는다.

주변인물들이 탐정을 자제시키면 좋으련만, 그들도 탐정의 현학취미에 압도당한듯 속수무책으로 귀를 기울일 뿐이다. 이런 작품들을 읽다보면 '이렇게 떠들기만 하다가 언제 범인을 잡으려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다.

변사사건이 연달아 일어나는 대저택

잘 읽히는 추리소설의 대표작이 셜록 홈즈가 등장하는 단편이라면, 안 읽히는 추리소설의 대표작으로는 오구리 무시타로의 <흑사관 살인사건>을 꼽고 싶다. 제목만 봐서는 무척이나 단순해 보이는 작품이다. '흑사관'이라는 저택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고 '노리미즈'라는 탐정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현장으로 향한다.

이 흑사관의 정체부터가 단순하지 않다. 수십 년 전에 영국인 기술자가 일본에서는 미증유라고 할 수 있는 화려한 서양식 건물을 기공하였다. 그런데 이 건물이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한 사람들을 집어 넣었다는 프로방스 요새와 비슷하다고 해서 '흑사관'이라는 불길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


이름처럼 저택에서는 그동안 세 차례의 기괴한 변사사건이 있었다. 살인과 자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총 5명이 저택 안에서 목숨을 잃은 것이다. 이쯤되면 사람들이 저택을 버리고 떠날만도 하건만 무슨 미련이 남았는지 아직도 저택에 붙어있다. 마지막 변사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흑사관의 성주인 산테쓰였다. 산테쓰가 죽고나서 1년 후에 작품이 시작된다.

산테쓰의 아들인 17세 소년 하타타로가 흑사관의 성주 노릇을 하고 있다. 흑사관에는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다. 산테쓰의 개인비서, 도서관 사서, 집사와 함께 네 명의 음악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정말로 이상한 것은 바로 네 명의 음악인이다. 이 서양인 사중주단원들은 젖먹이일 때 이 저택으로 왔는데 그때부터 한 차례도 흑사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 저택을 둘러싼 온갖 소문들이 떠도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급기야는 흑사관에서 잔인한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만다. 탐정 노리미즈는 친구이자 검사인 하제쿠라와 함께 흑사관으로 향한다. 하지만 첫번째 살인에 대한 단서를 제대로 잡기도 전에 또다른 살인사건이 터진다.

탐정이 쏟아내는 방대한 지식들

장소와 설정이 약간 독특하지만 도입부 자체는 읽어나가기에 별 어려움이 없다. 문제는 노리미즈가 흑사관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특이한 역사를 가진 저택이니만큼 내부 구조와 장식도 기묘하기만 하다. 노리미즈는 그런 장식을 볼때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련 지식들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거기에는 점성술과 심리학, 독극물학, 점묘법, 흑마술 등 다양한 학문과 전설이 포함되어 있다. 어떻게 한 인간의 머릿속에 이렇게 많은 지식이 담겨있는지,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그것을 정확하게 꺼낼 수 있는지 궁금할 정도다. 용의자를 추궁하면서 태양계 내행성의 궤도 반지름과 살인의 연관성을 설명하기도 한다.

이런 면 때문에 <흑사관 살인사건>은 일본 미스터리 3대 기서 중 하나로 꼽힌다. 낯설고 난해한 지식들이 발목을 잡아서 읽어나가기도 쉽지 않다. 작품의 분위기를 이렇게 몰고 간 것은 탐정의 책임이니 노리미즈에게도 미스터리 사상 손에 꼽을 기인의 자리를 주어야 마땅할 것이다. 작품 속에서 검사는 노리미즈에게 '자네는 입 좀 닥치고 몸을 움직이게'라고 말하기도 한다.

노리미즈는 그래도 굴하지 않고 떠들어 댄다. 친구의 말처럼 좀더 몸을 움직였더라면 어땠을까. 독자들이 작품을 읽는 속도도 빨라졌을 것이고, 어쩌면 연쇄살인이 그만큼 빨리 해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흑사관 살인사건>은 안 읽히는 추리소설이지만, 그래서 더욱 읽고 싶은 소설이기도 하다.

덧붙이는 글 | <흑사관 살인사건>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 김선영 옮김. 북로드 펴냄.


덧붙이는 글 <흑사관 살인사건>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 김선영 옮김. 북로드 펴냄.

흑사관 살인사건

오구리 무시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북로드, 2011


#흑사관 살인사건 #추리소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동네 뒷산 올랐다가 "심봤다" 외친 사연
  2. 2 '파묘' 최민식 말이 현실로... 백두대간이 위험하다
  3. 3 1심 "김성태는 CEO, 신빙성 인정된다"... 이화영 '대북송금' 유죄
  4. 4 채 상병 대대장 "죗값 치르지 않고 세상 등지려... 죄송"
  5. 5 제주가 다 비싼 건 아니에요... 가심비 동네 맛집 8곳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