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선로에 시각장애인이 떨어졌다

[연재동화 - 안내견 뭉치와 로봇 친구 또또(12)] 민재의 수난 시대

등록 2012.02.27 12:03수정 2012.02.27 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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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치가 안내견센터에서 치료를 받는 기간이 길어짐에 따라 민재가 혼자서 다녀야 하는 기간도 길어졌습니다. 그날도 평소와 다름없이 지각할 것 같아서 헐레벌떡 지하철역으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민재네 아파트에서 지하철역까지는 구청에서 민재를 위해 점자 블록을 깔아주었습니다. 민재네 아빠가 몇 차례 구청에 부탁도 하고 민원도 넣어서 해결된 일이었습니다.

점자 블록을 따라 급하게 달려가던 민재는 무언가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새로 생긴 김밥 전문점에서 내다 놓은 간판이었습니다. 민재는 간판과 함께 와장창 소리를 내며 넘어졌습니다.


"아이쿠! 누가 점자 블록에 이런 걸 내다 놨지?"

민재는 손에서 놓친 흰지팡이를 찾으려 더듬거리며 투덜거렸습니다. 겨우 흰지팡이를 찾은 민재는 다시 지하철역으로 향하려 했습니다.

"이봐! 학생. 이거 망가뜨리고 어딜 가는 거야?"

앙칼진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민재는 무슨 일인지 몰라 그 자리에 멈춰 서서 두리번거렸습니다.

"앞이 안 보인다고 남의 간판을 망가뜨려 놓고 도망가려고 하면 어떡해!"


누군가 민재의 팔을 우왁스럽게 잡았습니다. 김밥 전문점 주인아줌마였습니다.

"죄. 죄송해요. 제가 일부러 그런 게 아니고 여기 점자 블록 위에 올려져 있기에 할 수 없이…."
"빨리 이거 고쳐 놓든지 수리비 물어내고 가."
"지금은 돈이 없는데요. 이따가 학교 갔다 와서 부모님께 말씀드려 반드시 변상해 드릴게요."
"거짓말 하지 마. 도망가려고 하지. 너 같은 병신 말을 어떻게 믿어. 지금 당장 너네 집으로 가자."


아줌마는 민재의 팔을 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습니다. 주변의 오가는 사람들은 그런 민재와 아줌마를 힐끔힐끔 쳐다볼 뿐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어이. 김민재. 여기서 뭐 하고 있냐? 지금 학교 늦었어."

짝꿍인 이동욱의 목소리였습니다. 민재는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다혈질인 동욱이가 화가 나서 씩씩거렸습니다.

"아줌마. 이건 간판을 넘어뜨린 민재가 잘못한 게 아니고 점자 블록 위에 간판을 내다 놓은 아줌마가 잘못한 거잖아요. 아줌마가 민재한테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어디 다쳤는지 물어봐야지 그렇게 간판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우기면 어떡해요."

동욱이는 또박또박 따져 물었습니다.

"넌 또 뭐야? 그럼 멀쩡한 간판을 넘어뜨려서 망가뜨려 놓고 안 물어내겠다는 거야? 그건 순 도둑놈 심뽀지. 가뜩이나 요즘 장사도 안 되는데 아침부터 재수 없게. 장님이 간판을 부수고 난리야."
"민재야. 이 아줌마하고는 말이 안 통하겠다. 그냥 가자."

동욱이가 민재의 팔을 끌며 말했습니다.

"어딜 도망가? 그렇게는 못하지. 빨리 간판 값 물어내."

아줌마는 악다구니를 쓰며 민재의 반대 팔을 잡아끌었습니다. 덕분에 민재는 동욱과 아줌마에게 양 쪽 팔을 붙잡힌 꼴이 되었습니다.

"민재야. 빨리 가자니까. 학교 늦겠어."
"어딜 가. 간판 물어내."

민재의 양 쪽에서 동욱이와 아줌마가 서로 으르렁거렸습니다.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아줌마와 민재 일행을 빙 둘러서 무슨 재미난 구경거리라도 만난 듯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게 된 사람들은 아줌마를 향해 야유도 보내고 야단도 쳤습니다.

"저 아줌마. 정말 나쁜 아줌마네."
"점자 블록에 간판을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사람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저런 아줌마네 김밥집은 망해야 해."
"그러게 말이야. 가뜩이나 어려운 시각장애인을 도와주지는 못하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은 아줌마는 더욱 화가 나서 간판 수리비를 물어내라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습니다.

"법대로 하면 되겠네. 길가에 그것도 점자 블록에 물건을 아무렇게나 내다 놓는 일은 아마 불법일걸?"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말했습니다. 동욱이는 '옳다구나!'하면서 재빨리 스마트폰을 꺼냈습니다. 그리고 관련 법을 검색했습니다.

"아줌마. 여기 보세요. 간판을 아무렇게나 내다 놓으면 옥외광고물관리법에 위배된다고 되어 있어요. 2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어야 하네요. 또 도로에 간판이나 물건등의 노상적치물을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면 도로정비법에도 위반되고요. 이것도 과태료를 물어야 하네요. 점자 블록에 물건 등을 올려놓아 장애인의 통행을 방해하면 장애인 편의시설증진법에도 위배되고요. 어떻게 할까요? 경찰을 불러서 누가 잘못했는지 따져볼까요?"

동욱이는 의기양양해서 말했습니다. 동욱이가 아줌마한테 스마트폰을 보여주며 따지자 아줌마의 얼굴이 벌겋게 흥분되었습니다.

"그래. 경찰에 신고해야겠다. 저 못된 아줌마 벌금 물어야 해."
"저런 마음으로 어떻게 음식 장사를 한담."

사람들은 웅성거리며 모두 아줌마를 욕했습니다. 아줌마는 이제까지와 달리 아무 말도 못 했습니다. 화가 안 풀려 씩씩대고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줌마. 이제 가도 되죠? 우리 늦으면 화장실 청소해야 한다고요. 아줌마가 대신 해주실래요?"

동욱이가 말하자 아줌마는 그때까지 잡고 있던 민재의 팔을 놓았습니다. 민재와 동욱이는 사람들의 틈을 빠져나왔습니다. 겨우 빠져나오긴 했지만 민재의 기분은 엉망이었습니다. 아직도 민재의 팔은 얼얼할 정도로 아팠습니다. 오늘도 둘은 지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줌마 덕분에 민재는 또 다시 화장실 청소를 해야 할 것같습니다.

오후에 학교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였습니다. 웬일인지 오늘따라 지하철을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른 날과 달리 지하철역이 사람들로 꽉 찼습니다. 플랫폼에 겨우 내려가서도 민재는 한참 동안 열차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역에선 열차가 고장 났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는 방송이 되풀이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에도 사람들은 꾸역꾸역 모여들었습니다.

민재가 열차를 기다린지 한 시간쯤 지나서야 열차가 역으로 들어왔습니다. 열차가 도착하자 역은 엄청 혼잡해졌습니다. 열차에서 내리려는 사람, 열차를 타려는 사람들로 플랫폼은 아수라장이 되었습니다. 민재도 열차를 타기 위해 필사적으로 사람들을 헤치며 애를 썼습니다. 뒤에서는 사람들이 밀고 당기고 야단이었습니다.

"열차 문이 닫힙니다. 아직 승차하지 못한 승객께서는 다음 열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안내 방송이 계속 나왔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열차 문 앞에서 아우성을 치고 있었습니다. 민재도 조금씩 조금씩 열차를 타기 위해 열차 쪽으로 밀려들어갔습니다. 드디어 열차가 있는 곳까지 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손으로 열차의 벽을 확인했습니다. 이제 문만 찾으면 되었습니다. 조금씩 옆으로 움직이며 문을 찾았습니다. 열차의 벽이 끝났습니다. 민재는 드디어 문을 찾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뒷사람들에 밀려 민재가 안으로 쑥하고 밀려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민재는 웬일인지 허공으로 곤두박질쳤습니다. 순간 민재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영문을 몰랐습니다. 그저 갑자기 어딘가 모르는 곳으로 떨어져 버린 것 같았습니다. 분명히 문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했는데 바닥으로 곤두박질을 쳤으니 전혀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의 비명과 놀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선로에 사람이 빠졌다."
"위험하다. 열차가 출발하면 안 된다."
"빨리 사람을 구해야 한다."

민재는 순간 상황을 알아챠렸습니다. 민재가 문이라고 생각한 곳은 문이 아니고 객차와 객차 사이의 공간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순간 민재는 정신이 아득해졌습니다. 지금 플랫폼은 엄청 소란스럽기 때문에 열차 기관사가 민재가 선로에 빠진 것을 모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그대로 열차가 출발한다면….

생각만 해도 온몸에 소름이 쫙 끼쳤습니다. 민재는 황급히 그러나 차분하게 그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플랫폼 쪽을 향해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사람 살려주세요. 누군가 도와주세요. 전 앞이 안 보이는 시각장애인입니다. 사람 살려주세요."

민재는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소리쳤습니다. 누군가 민재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그리곤 공중에서 휘적대고 있는 민재의 손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몇 사람이 민재의 손이며 팔등을 잡았습니다. '영차!' 사람들은 힘껏 민재를 위로 들어 올렸습니다. 민재는 겨우겨우 선로에서 다른 사람의 도움으로 플랫폼으로 올라올 수 있었습니다.

그때 덜컹하며 천천히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누구보다 민재 자신이 죽다가 살아난 것같았습니다. 아니 죽다가 살아났습니다. 가슴이며 옆구리가 아파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픔보다 더욱 아픈 것은 마음이었습니다.

민재는 아침과 저녁에 겪은 일로 새삼 뭉치가 생각이 났습니다. 만약 뭉치가 함께 했더라면 점자 블록에 있는 간판에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을 터였고, 이렇게 지하철 선로에 떨어지는 무서운 경험도 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입니다. 민재는 다시금 뭉치가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루빨리 안내견 로봇을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안내견 뭉치 #지하철 추락 ㅎ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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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급 시각장애인으로 이 땅에서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장애인의 삶과 그 삶에 맞서 분투하는 장애인, 그리고 장애인을 둘러싼 환경을 기사화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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