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왜 '재외국민 투표' 폐지했나

[정운현의 역사 에세이 33] 1972년 유신헌법 제정, '체육관 선거'로 대통령 선출

등록 2012.04.16 15:54수정 2012.04.16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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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헌정사상 처음으로 이번 4·11 총선에서 '재외국민 투표'가 실시됐습니다. 지난 3월 28일부터 4월 2일까지 세계 107개국, 158개 재외투표소에서 재외국민 투표가 치러졌습니다.

선관위 발표에 따르면, 전체 재외선거 대상자 223만3193명 가운데 투표를 위해 등록을 마친 사람은 총 12만3571명. 이들 가운데 실지로 투표를 한 사람은 5만6456명으로 집계됐습니다. 투표율은 45.7%로 선거인 등록절차를 마치고서도 실제 투표에 참여한 사람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 셈입니다. 전체 재외 유권자로 치면 실투표율은 2.5%에 그쳤습니다.

그럼에도 이번 재외국민 투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선 재외교포(체류자 포함)들의 참정권을 보장했다는 점을 우선으로 들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헌법 제24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선거권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또 공직선거법 제15조(선거권) ①항에는 "19세 이상의 국민은 대통령 및 국회의원의 선거권이 있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사는 곳이 어디든 대통령 및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습니다.

주권자인 국민의 참정권 제한은 최소한에 그쳐야 함에도 그간 300여만 명에 이르는 재외국민들은 단지 나라 밖에 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국민주권 주체로서의 권리를 충분히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07년 6월 28일 헌법재판소가 재외국민(국외거주자)의 선거권 및 평등권 침해, 또 보통선거 원칙 위반 등을 이유로 공직선거법 제37조 제1항(주민등록 등재여부로 선거권 행사 결정)과 동법 제38조 제1항(국내거주자에 한하여 부재자신고 허용)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바 있습니다. 이로써 관련법이 개정되면서 재외국민도 국외에서 참정권 행사가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이번 4.11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재외국민 투표가 실시됐다. 사진은 조수미씨가 모델로 등장한 홍보 포스터.
이번 4.11 총선에서 사상 처음으로 재외국민 투표가 실시됐다. 사진은 조수미씨가 모델로 등장한 홍보 포스터.중앙선관위

파월 장병, 파독 광부·간호사들 위한 해외 부재자투표


최근 '사상 처음' 치러진 재외국민 투표 관련 글을 하나 쓴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며칠 뒤 외국에 사는 교포 한 분이 이메일을 보내와 '사상 처음'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해주었습니다. 그분은 과거 1960, 1970년대 파월 장병이나 파독 광부, 간호사들도 현지에서 투표를 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 지적을 받고서야 저는 그 시절의 재외국민 투표를 떠올렸습니다. 그렇다면 그분의 지적대로 재외국민 투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닐까요? 

그에 앞서 먼저 '재외국민'에 대한 정의부터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재외국민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 외국에 거주하면서 해당국가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로 흔히 우리가 '재외교포'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다.


또 한 부류는 '일시 체류자'들입니다. 유학생, 공관원, 상사맨, 해외근로자, 원양어업 종사자 등이 그들인데 이들의 국적은 대한민국입니다. 따라서 이들은 해외에 체류하더라도 '부재자투표' 차원에서 당연히 투표권 행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거주 국가의 국적(혹은 영주권)을 가진 '재외교포'들은 국내 선거에 투표권이 없었습니다. 다만 '일시체류자'들은 선거권이 있었는데 이는 1966년 12월에 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따라 '해외 부재자투표'가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근거로 1967년에 치러진 제6대 대선과 제7대 국회의원 선거, 또 1971년에 치러진 제7대 대선과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해외 부재자투표가 실시됐습니다.

한국은 베트남전쟁이 치열해지기 시작한 1964년부터 휴전협정이 조인된 1973년까지 8년간에 걸쳐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했는데, 그들은 베트남 현지부대에서 투표에 참가하였습니다. 또 1966년 한국정부는 서독과 특별고용계약을 맺고 간호사로 3000명, 탄광광부로 3000명을 파견하였습니다.

 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해외 부재자투표 실태를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1967. 4. 26)
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해외 부재자투표 실태를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1967. 4. 26)경향신문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3년 계약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포가 아니라 모두 일시 체류자들이어서 모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월 26일자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열띤 유세 속에 대통령선거(5월 3일)는 앞으로 1주일. 본국의 선거과열을 피부로 못 느끼지만 해외교표들의 선거 관심은 대단하다.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대통령선거 해외 부재자 투표에서 투표지를 보내온 교포는 26일 현재 모두 1천1백7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교포들의 선거 관심이 오히려 본국 유권자보다 높다고 분석했다.  

파월장병 중 4만1천631명의 투표지는 27일 우리 공군 수송기 편에 실려 김포공항에 닿을 예정이다. 26일 NWA기편으로 정로까지 도착한 해외부재자의 우편 투표상황은 다음과 같다. ▲ 월남 20 ▲ 독일 5백89 ▲ 태국 87 ▲ 미국 67 ▲ 영국 13 ▲ 불란서 14 ▲ 홍콩 13 ▲ 일본 1백57 ▲ 비율빈(필리핀) 12 ▲ 중국 19 ▲ 말레이지아 13 ▲ 호주 15 ▲ 쉬든(스웨덴) 4 ▲ 멕시코 8 ▲ 모로코 5 ▲ 쉬스(스위스) 12 ▲ 이디오피아 1 ▲ 벨기에 12 ▲ 오지리(오스트리아) 16 ▲ 덴마크 7 ▲ 이스파니아(스페인) 1 ▲ 싱가포르 3

위에서 보다시피 재외 부재자투표는 이미 치러진 바 있습니다. 1965년 당시 언론의 보도를 보면, 재외 부재자 투표를 놓고 하자니 번거롭고 안 하자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게 되고 해서 여야 간에 논란이 됐던 사안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1966년 12월에 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따라 '해외 부재자투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게 됐던 것입니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으로 사라진 해외 부재자투표

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유신헌법'을 제정해 해외 부재자투표는 사라지게 됐습니다. 유신헌법은 종래 직접선거로 뽑던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선거로 뽑도록 바꾸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소위 '체육관선거'입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제35조에 의거하여 탄생했는데 주임무는 대통령 선출과 대통령이 추천한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국회의원 1/3을 뽑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야당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었으며, 이는 곧 여당이 자의적으로 선거를 조작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한 셈입니다.

1972년 12월 15일 제1기 대의원선거에서 당선된 235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그달 2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후보는 대의원 등 515명의 추천을 받은 박정희 후보가 단독으로 입후보했습니다. 투표 결과 전체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가운데 2357표(무효 2표)라는 절대적인 찬성으로 박정희 후보가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나흘 뒤인 12월 27일 4선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직접선거일 경우 재외 일시거류자도 투표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만, 통대의원들이 간접선거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함에 따라 재외 체류자들의 투표권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1972년 12월 30일 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서는 부재자 신고 대상을 국내 거주자로 제한함에 따라 외국 거주자는 참정권 행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거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체되었으나 재외교포들에게 투표권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역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면서 체육관선거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직선제는 1987년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그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비로소 부활됐습니다.

 '유신헌법'의 산물로 등장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종전의 직접선거 대신 간접선거 방식으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동아일보, 1972. 12. 6)
'유신헌법'의 산물로 등장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종전의 직접선거 대신 간접선거 방식으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했다.(동아일보, 1972. 12. 6) 동아일보

프랑스에서, 일본에서... 쏟아진 '헌법소원'

한편, 재외국민들의 참정권 문제는 이후로 계속해서 논란이 돼 왔습니다. 그러던 중 1997년 5월 프랑스 교포 김제완씨가 헌법재판소에 헌법소원 제기한 데 이어, 석 달 뒤인 8월에는 한 재일교포가 또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하면서 이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그해 6월 이부영 당시 신한국당 의원과 재외동포 138명은 여야 의원 12명의 서명을 받아 '재외국민 선거권 보장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이부영 의원은 당시 국민회의와 자민련과 함께 정치개혁특별법안으로 입법 추진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해 있은 대선에서 김대중, 이회창, 김종필 후보는 당선되면 임기 중에 재외국민 참정권을 도입하겠다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헌법재판소는 1999년 1월 28일 재일교포가 낸 헌법소원을 기각한 데 이어 그해 3월 25일에는 프랑스 교포의 헌법소원도 기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2001년 11월 26일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을 위한 한겨레네트워크' 준비위(공동간사 김제완, 정지석)가 발족하였고, 이듬해 1월 이부영 의원은 이를 재차 추진했으나 법안동의 발의 실패로 좌절되었습니다.

그해 2월 정범구 의원은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을 위한 한겨레네트워크 준비위'와 공동으로 공청회를 연 후 법안 발의에 나섰으나 그 역시 법안 발의요건인 20명의 서명을 받지 못해 좌절되었습니다. 그러자 재일교포 이건우씨 등 5명은 그해 3월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재외국민 참정권 회복을 위한 한겨레네트워크' 준비위는 2002년 5월부터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서명운동을 전개했고 450여 명이 이에 참가하였습니다. 미국 LA, 시카고를 중심으로 서명운동이 확산되자 2004년 7월 20일 정성호 의원은 선거법 개정안 발의를 통해 재외국민투표를 제안했습니다. 이밖에도 유기준, 홍준표 의원 등이 이 대열에 동참했고, 2005년 3월 31일 김덕룡 의원 주최로 '재외국민 참정권 대토론회'가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렸습니다.

4월에는 캐나다 한인회총연합회와 미주 한인회총연합회가 다시 헌법소원을 제기했습니다. 2007년 2월 재외국민 참정권연대 준비위위원회가 발족되었고, 2007년 6월 헌법재판소는 마침내 재외국민과 국외 거주자들에게 선거권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습니다.

10년 만에 헌법불합치 결정... OECD 국가 중 '막차'

 지난달 31일(현지시간) 4.11총선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뉴욕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투표소 입구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지역구(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후보들을 확인하고 있다.
지난달 31일(현지시간) 4.11총선 재외국민 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미국 뉴욕 한국총영사관을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투표소 입구에 설치된 컴퓨터를 통해 자신의 지역구(서울 동작을)에 출마한 후보들을 확인하고 있다. 최경준

1997년 프랑스 교포 김제완씨의 헌법소원 제기로부터 시작된 재외교민 참정권 회복운동은 이로써 10년 만에 결실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헌재의 결정을 토대로 2009년 2월 12일 공직선거법 제37조 제1항(주민등록 등재여부로 선거권 행사 결정) 및 동법 제38조 제1항(국내거주자에 한하여 부재자 신고 허용)이 개정돼 재외교민에게도 투표권이 사상 처음으로 주어졌습니다.

아울러 국내 영주권 자격을 취득한 지 3년이 경과한 외국인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습니다. 이에 근거하여 지난 4월 11일 치러진 제19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처음으로 재외교민의 투표 참여가 실현된 것입니다. 재외 부재자투표는 앞서 소개한 대로 1960, 1970년대에도 있었지만 재외교민의 투표참여는 이번이 '사상 처음'인 셈입니다. 

재외교민 선거는 재외교민들의 참정권 구현이라는 의의 말고도 한국의 국격을 한 단계 높였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선관위는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마지막으로 재외선거제도를 도입하게 되었다"며 "재외선거제도의 도입은 정치 선진국 진입 여부의 가늠자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완성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재외교민 투표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선진국 가운데 막차를 탄 셈입니다.

사상 처음 치러진 이번 재외선거제도는 고비용 대비 낮은 투표율은 물론 인터넷투표 도입 등 장차 개선해야 할 과제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올 연말 대선에 앞서 만반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재외국민투표 #박정희, 유신헌법 #통일주체국민회의 #체육관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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