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에 앞서 해외 부재자투표 실태를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1967. 4. 26)
경향신문
1977년까지 독일로 건너간 광부는 7932명, 간호사는 1만226명에 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3년 계약이었습니다. 이들은 교포가 아니라 모두 일시 체류자들이어서 모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1967년 5월 3일 치러진 제6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4월 26일자 <경향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습니다.
열띤 유세 속에 대통령선거(5월 3일)는 앞으로 1주일. 본국의 선거과열을 피부로 못 느끼지만 해외교표들의 선거 관심은 대단하다. 건국 후 처음으로 실시하는 대통령선거 해외 부재자 투표에서 투표지를 보내온 교포는 26일 현재 모두 1천1백7명.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교포들의 선거 관심이 오히려 본국 유권자보다 높다고 분석했다. 파월장병 중 4만1천631명의 투표지는 27일 우리 공군 수송기 편에 실려 김포공항에 닿을 예정이다. 26일 NWA기편으로 정로까지 도착한 해외부재자의 우편 투표상황은 다음과 같다. ▲ 월남 20 ▲ 독일 5백89 ▲ 태국 87 ▲ 미국 67 ▲ 영국 13 ▲ 불란서 14 ▲ 홍콩 13 ▲ 일본 1백57 ▲ 비율빈(필리핀) 12 ▲ 중국 19 ▲ 말레이지아 13 ▲ 호주 15 ▲ 쉬든(스웨덴) 4 ▲ 멕시코 8 ▲ 모로코 5 ▲ 쉬스(스위스) 12 ▲ 이디오피아 1 ▲ 벨기에 12 ▲ 오지리(오스트리아) 16 ▲ 덴마크 7 ▲ 이스파니아(스페인) 1 ▲ 싱가포르 3위에서 보다시피 재외 부재자투표는 이미 치러진 바 있습니다. 1965년 당시 언론의 보도를 보면, 재외 부재자 투표를 놓고 하자니 번거롭고 안 하자니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게 되고 해서 여야 간에 논란이 됐던 사안입니다. 그러다가 결국 1966년 12월에 개정된 대통령선거법에 따라 '해외 부재자투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게 됐던 것입니다.
박정희의 '유신헌법'으로 사라진 해외 부재자투표그러나 이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목적으로 '유신헌법'을 제정해 해외 부재자투표는 사라지게 됐습니다. 유신헌법은 종래 직접선거로 뽑던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간접선거로 뽑도록 바꾸었습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소위 '체육관선거'입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유신헌법 제35조에 의거하여 탄생했는데 주임무는 대통령 선출과 대통령이 추천한 정수의 1/3에 해당하는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과 국회의원 1/3을 뽑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은 정당에 가입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습니다. 이렇게 되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에서 야당은 자연스럽게 배제되었으며, 이는 곧 여당이 자의적으로 선거를 조작할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한 셈입니다.
1972년 12월 15일 제1기 대의원선거에서 당선된 2359명의 대의원들로 구성된 통일주체국민회의는 그달 23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제8대 대통령선거를 실시하였습니다. 후보는 대의원 등 515명의 추천을 받은 박정희 후보가 단독으로 입후보했습니다. 투표 결과 전체 대의원 2359명이 참석한 가운데 2357표(무효 2표)라는 절대적인 찬성으로 박정희 후보가 제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나흘 뒤인 12월 27일 4선 대통령에 취임하였습니다.
직접선거일 경우 재외 일시거류자도 투표에 참가할 수 있습니다만, 통대의원들이 간접선거로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함에 따라 재외 체류자들의 투표권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1972년 12월 30일 제정된 국회의원선거법에서는 부재자 신고 대상을 국내 거주자로 제한함에 따라 외국 거주자는 참정권 행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1980년 10월 27일 공포된 제5공화국 헌법 부칙에 의거해 통일주체국민회의는 해체되었으나 재외교포들에게 투표권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 역시 대통령 간선제를 고수하면서 체육관선거를 치렀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직선제는 1987년 '6월항쟁'으로 '6·29선언'이 발표되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고, 그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에서 비로소 부활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