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 올랐다. 빨간 동그라미 속이 필자.
조남희
육지로 돌아간 친구, 혼자남은 난... 적막했다군산에 오른 뒤 친구를 제주공항까지 바래다줬다. 친구는 공항으로 들어가고, 결국 나 혼자 남았다. 적막했다. 제주공항 활주로보다 길고 텅빈 길이 내 가슴에 남은 듯했다. 올 땐 둘이었으나, 갈 땐 혼자였다. 공항에서 집까지 40분, 먹먹한 가슴을 꾹꾹 눌렀다.
운동화를 빨다가 울어본 적이 있는가. 배웅을 마치고, 빈 집에 돌아와 엉망이 된 신발들을 빨다 말고 외로움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운동화를 빨다 말 수 없고, 흙으로 엉망이 된 욕실도 치워야 했다. 나는 제주에서 또 하나의 섬이었다.
제주에서 살겠다고 다짐할 때 이미 예상했던 쓸쓸함이다. 하지만 막상 그것과 대면하니, 견디고 받아들이는 일이 때로는 버겁기도 하다. 아름다운 제주에 사는 건 무척 좋지만, 홀로 눈물을 훔치는 일도 숙명인 듯하다.
뭍으로 떠나지 않는, 떠날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졌다. 제주도민과 친구되기. 사실 쉬운 일이 아니다. 섬 사람이 육지 사람들에게 배타적일 수 있다는 것은, 가만 생각해보면 쉽게 공감할 수 있다. 살아온 땅이 다르고, 말씨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다. 그들에게 나는 어디선가 굴러들어와 언제 또 어디로 굴러갈 지 알 수 없는 돌일 뿐이다.
언제 떠날지 모르는 사람에게 곁을 내어주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조심스레 도민들의 제주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다. 물론 나와 같은 '제주 이민자'들과도 교류해야겠지만 말이다.
오리지널 제주도민, 하면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작년 여름 8월 첫 주였다. 혼자 제주에 와 협재 해수욕장을 찾았다. 비키니를 입은 처자들이 해안선에 길게 누워 있는 광경을 접한 순간, 나는 알았다.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걸. 나는 사람이 많아 북적대는 걸 별로 안 좋아한다. 더구나 8월 첫 주는 휴가철의 절정 아닌가. 내가 왜 이걸 생각 못했을까. 심지어 어디선가 방송도 들려왔다.
"서울 반포에서 온 OOO 어린이, 부모님에게 돌아가세요."반포라니. 서울 반포라니. 서울을 피해온 내게 너무 가혹한 단어였다. 반포 고속터미널 부근의 교통체증이 떠오른다. 반포에서 온 어린이가 원망스러워졌다. 어디로 가야 하나, 고민하다 방파제 쪽을 보니 사람이 없었다. 막걸리 두어 병을 샀다.
나는 여행을 가면 언제 어디서나 펼쳐 깔고 앉을 수 있게 항공담요를 준비한다. 그날은 오는 길에 비행기에서 슬쩍한 항공담요를 깔았다. 마일리지로 비즈니스 클래스를 타고 오면서 항공담요를 슬쩍했다는 것이 뭔가 우스웠지만, 어쨌든 항공담요는 이럴 때 무척 유용하다.
담요를 방파제 한 구석 바닥에 곱게 깔고 가지고 온 책을 펼쳤다. 동네 할아버지가 손주와 산책을 하고 계셨다. 나의 막걸리를 탐하는 눈길이 느껴진다.
"앉으세요, 할아버지, 막걸리 한잔 하세요." 막걸리 잔이 오고 갔다. 내가 사온 막걸리는 어느새 동이 났다. 나는 '막걸리 셔틀'이 되어 있었다. 어쩌다 보니 그 동네 부녀회장님이라는 해녀 아줌마까지 셋이 말을 섞게 되었다.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이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녀서 영 불편스러워~. 나는 괜찮은데 아들이 젊어서 좀 그래~.""정작 너무 신경 쓰시는 건 할아버지가 아닌가요?"라고 물으려다 참았다. 부녀회장 아주머니는 비양도의 해녀들과의 구역다툼 이야기를 비롯해 제주로 시집 온 이주여성 이야기 등등을 풀어내셨다.
막걸리에 얼큰히 취해버린 자리 끝에, 할아버지는 다음날 새벽 함께 낚시를 가자고 하셨다. 제주에서 젊은 남자 여행자의 전화번호가 아니라 동네 할아버지의 전화번호를 따게 될 줄 이야. 다음날 새벽, 전날의 막걸리가 채 깨지도 않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헉, 정말로 할아버지에게 전화가 왔다!
"여기 게스트하우스 앞이야, 나와." "(헉) … 네."할아버지의 지프차를 타고 대정으로 내달렸다. 내 얼굴이 탈까 싶어, 내가 쓸 모자까지 준비한 할아버지. 낚시 포인트에 도착했다. 나는 갯바위에 앉아 졸고 있는데... 세상에나, 할아버지는 실한 벵에돔을 줄줄이 낚아 올리셨다. 이어 그 자리에서 능숙한 솜씨로 회를 떠 주셨다. '모닝 소주' 한잔이 빠질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