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곰씨비씨' 게스트하우스의 카페 모습. 바다가 지척이다.
조남희
그러던 어느날 밤, '곰씨비씨'에 딸린 작은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한라산 야간등반'(한라산 소주를 마시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부른다)이 한창이었다. 안주는 주인장 친구분이 부산에서 공수해온 어묵과 납작만두. 잔 채우기가 무섭게 빈 병들이 쌓여간다.
술과 안주가 끊기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 엉덩이 붙일 틈이 없는 건 보통 그 자리 막내의 숙명이다. 더구나 난 그 집 살림구조 파악을 끝낸 '장기수' 막내다. 열심히 술과 안주를 날랐다. 잠시 뒤 취기오른 구수한 부산 사투리가 나를 향했다.
"이 놈 이거, 맘에 드는데!"막내로서 '싸가지'와 '법도'를 안다는 칭찬이다. 다음날 아침, 내가 먼저 말했다.
"언니, 이 동네에 집을 구해야 하는데, 연세집이 없어서 걱정이에요." "… 그래? 우리 단골고객님이 여기 대평리 부녀회장님이랑 이십 년지긴데, 전화 함 넣어서 물어나 볼까?" "진짜요?"점심 먹으러 한 번 들렀던 '용왕 난드르'(대평리 주민들이 운영하는 식당)의 '아줌마'는 부녀회장이셨으며, 연세를 놓을 민박집 주인이자 지금은 내가 사는 집의 주인이다. 그것도 수도요금과 전기요금도 연세에 포함시켜 준 '쏘쿨'한 집주인. 더 이상 '다운'시킬 여지가 없는 연세 170만 원. 계약서도 안 썼다.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인 어린 시절, 우리 집은 한남동의 달동네였다. 전라도 총각과 부산 처녀가 만나 빈손으로 상경해서 애 둘 낳고 사는 달동네 문간방 사글세 살이. 주인집 여자 아이가 사글세 집 아이인 나를 그렇게 괄시했다고 한다. 그걸 보는 엄마 마음이 어땠을까. (나는 기억이 없는 게 참 다행이다.)
달동네를 벗어나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 이사간 잠실의 주공아파트. 지금은 재건축이 되어 비싸고 높은 아파트들이 들어섰지만, 그 시절엔 그 대단지가 모두 저층이었다. 지금 남아있는 잠실 5단지만이 유일한 고층아파트였는데, 학교를 가면 저층인 1~4단지 사는 아이들과 5단지 아이들로 분류가 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방 창문을 열면 5단지 아파트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느날 엄마가 말했다.
"5단지 사는 어느 집 엄마가 우리 집 있는 이 동네 가리키면서 애한테 그랬단다. '너 공부 안하면 저런 집에서 살게 된다'고." 그건 엄마의 자조였을까, 아니면 그 집 애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하라는 의미였을까?
엄마는 내가 성인이 된 뒤 돈 잘 벌어서 '좋은 집'에 살게 되기를 당연히 바라셨다. 하지만, 서울에 사는 것에 의미를 크게 두지 않게 된 지금, 나에게 좋은 집은 내 한몸 편히 누일 수 있는 집이다.
늦게 들어온 날 이중 주차를 할 수밖에 없어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는 이웃에게 차를 빼달라는 전화를 받지 않아도 되는 집. 창을 열면 한라산이 서 있고 주인집 아줌마가 라면 먹을 때 먹으라며 김치를 챙겨주시는 집.
지난달 육지에 들렀을 때 엄마에게 "더 이상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엄마 미안해요"라고 말했다. 우려와 달리 엄마는 내가 선택한 제주의 삶을 응원해 주셨다. 맘 편하게 살면 그게 제일 좋은 거라고.
조만간 엄마를 제주에 오시라고 할 생각이다. 내가 사는 집을 보여드리고, 함께 집 앞 군산에라도 올라야겠다. 그리고, 서울에 있을 때는 지쳐서 하지 못했던, 많은, 정말 많은 얘기를 할 작정이다.
한라산과 군산이 보이고 푸른 바다가 지척인, 연세 170만 원짜리 내 집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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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사는 서울처녀, 제주도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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