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0월 8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재향군인회 창설 60주년 향군의 날 기념행사에 참석해 이건개 무소속 대선후보와 인사하고 있다. (자료사진)
남소연
대선을 20여일 남겨둔 가운데 새누리당의 보수세 결집이 가속화 되고 있다. 새누리당은 최근 자유선진당을 합당해 충청권 공략에 나선 데 이어 이회창 전 자유선진당 대표를 영입했다. 이 전 대표는 24일 기자회견을 갖고 새누리당 입당과 동시에 박근혜 후보 지지를 선언했다. 보도에 따르면, 최근 박 후보가 이 전 대표를 직접 만나 도움을 요청했고 이 전 대표가 이에 화답했다고 한다. 이 전 대표의 입당으로 박 후보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는 미지수다. 충청권 표심을 굳히는 데는 도움이 되겠지만 '차떼기당 원조'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무소속 대선후보로 나섰던 이건개(71) 변호사가 박근혜 후보 지지를 표명하면서 후보직에서 사퇴했다. 이 후보는 지난 22일 새누리당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대한민국 미래세력이 통합할 때가 됐다, 과거에 집착해서 과거로 흠집 내고 과거를 탓하는 사람은 과거 세력"이라면서 "특히 안보를 무시하는 세력이 어떻게 미래의 대한민국을 찾을 수 있느냐"고 지적했다. 그는 또 "그나마 박 후보가 정치인 중 안보를 강조하고 지킬 의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박 후보를 지지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1941년 평양 태생인 이 후보는 서울대 법대 졸업 후 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대통령비서실 사정담당 비서관, 서울시경국장, 대전고검장을 거쳐 1996년 자유민주연합 소속으로 15대 국회에 진출했다. 대검 공안부장 시절인 1989년 소위 '서경원 의원 방북사건' 수사 당시 공안합동수사본부장을 맡아 공안정국을 주도했으며, 대전고검장 시절 슬롯머신업계 대부 정덕진으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현재 법무법인 '주원' 대표 변호사로 재직 중이다.
선대에서 시작된 인연... 이용문, 일찍 죽지 않았다면 현대사 달라졌 것 한편, 이 후보는 보수적 정치 성향은 물론 가족사(史)로도 박근혜 후보와 매우 가까운 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선대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후보의 부친 이용문 장군은 박 후보의 부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선배이자 직속상관이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용문 장군을 마음속으로 존경하며 매우 따랐다. 두 사람은 이승만 정권 시절 함께 '거사'를 도모하기도 했는데 이 장군이 비행사고로 요절하면서 이 계획은 좌절됐다. 만약 이용문 장군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한국 현대사는 크게 달라졌을 거라는 얘기마저 나온다.
이용문(李龍文·1916∼1953) 장군은 평양 태생으로 평양고보 졸업 후 일본 육사에 입학해 50기로 졸업했다. 그의 한 기수 위는 나중에 한국군에서 육참총장을 지낸 채병덕, 이종찬 장군이며, 박정희는 기수로는 7기 후배(57)였다. 육사 졸업 후 기병소위로 임관해 일본 도쿄 주둔 제1기병대를 거쳐 1943년 남방전선으로 전속된 그는 일제 패망 후 베트남·중국을 거쳐 1947년 9월 귀국하였다. 해방 당시 이용문의 계급은 일본군 소좌(소령). 이듬해 11월 육사 7기 특기생으로 들어가 소령으로 임관한 그는 한 달 뒤 중령으로 승진해 초대 기갑단장이 되었다.
1949년 4월 대령으로 승진한 이용문은 그해 7월 30일 5사단장으로 나간 백선엽의 후임으로 제2대 육본 정보국장에 부임했다. 여기서 이용문은 박정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숙군 재판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난 박정희는 정보국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이용문은 불과 3개월간 정보국장 자리에 있었으나 그 짧은 기간에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특히 박정희 쪽에서 이용문을 따랐다. 박정희의 일본 육사 선배들은 기수는 빠르지만, 박정희가 교사 3년을 마치고 입대한 까닭에 나이는 대개 박정희보다 아래였다. 그런데 이용문은 박정희(1917년생)보다 나이도 한 살 많았고, 기수로도 7기 선배였다.
이용문은 큰 덩치에 호방한 기질, 화려한 군 경력 등이 박정희를 압도했다. 성격상으로 보자면 치밀하고 꼼꼼한 성격의 박정희와는 정반대였지만 박정희로서는 비로소 믿고 따를 만한 선배이자 형을 만난 셈이었다. 그런 박정희를 이용문도 좋아했다. 1951년 준장으로 승진해 육본 작전 교육국장이 된 이용문은 정보국에 있던 박정희를 작전교육국 차장으로 발탁해 자신의 곁에 두었다. 그 무렵 두 사람은 시국관(時局觀)도 비슷해 대화가 잘 통하였고, 관계도 더욱 돈독해져 3년 뒤 두 사람은 '부산정치파동' 소용돌이에서 모종의 모의를 하기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