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선생 생전의 모습
가인연수관
물론 대법관이나 대법원장 출신 가운데 정계로 진출한 사람이 전혀 없진 않았다. '법조인의 표상'으로 불리는 가인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도 말년에 잠시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 적이 있다.
1957년 정년퇴임한 가인은 재야 법조인으로 활동하면서 이승만 독재정권과 각을 세우며 싸웠다. 법관회의에서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는 이승만 정권을 규탄했으며, 1959년 이승만 정권이 <경향신문>을 폐간시키자 비판 글을 쓰기도 했다.
1961년 5·16 군사쿠데타가 발생하자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는 글을 발표했으며, 야당 지도자들과 함께 군정의 종식을 촉구하기도 했다. 급기야 가인은 정치일선에 직접 나서기도 했다.
1963년 민정당(民政黨) 대표최고위원과 '국민의당' 창당에 참여해 대표최고위원을 지냈으며, 당시 야권의 윤보선·허정 등과 함께 야권통합 및 단일후보 조정에 나서기도 했다. 가인의 이같은 정치활동은 권력욕보다는 반독재 투쟁으로 보는 게 오히려 타당할 것이다.
출신(전직)을 떠나 역대 총리 가운데 국무위원 임명제청권을 실지로 행사하고 내각을 장악한 '총리다운 총리'는 참여정부 시절의 이해찬 전 총리 정도를 꼽는다. 대다수의 총리들은 정권의 국면 전환용 '방탄 총리'거나 아니면 일회용 '얼굴 마담'이 대부분이었다. '1인지하 만인지상'으로 불리는 총리가 하는 일이라곤 대통령의 연설문을 대독한다고 해서 '대독 총리'라는 말까지 생겨났던 걸 보면 과거 역대정부에서 총리의 위상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김황식 현 총리 역시 대법관 출신으로 광주지법원장·대법원 행정처 차장을 거쳐 2005년 11월부터 대법관을 지냈다. 이후 곧바로 감사원장에 발탁돼 만 2년간 근무한 뒤 김태호 내정자의 낙마로 2010년 10월 제41대 국무총리에 올랐다. 전형적인 관료 출신 이미지의 김 총리는 전남 장성 출신으로 소위 '호남 총리'다. 그러나 그가 호남 지역을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박근혜 당선인이 내걸었던 '호남총리론'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할 뿐이다.
김 총리와 비슷한 경력의 소유자로 한나라당 대표와 2002년 한나라당 대선후보를 지낸 이회창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서울민사지법과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거쳐 1981년 최연소 대법원 판사('대법관' 전신)으로 임명된 그는 1988년 대법관에 임명돼 사실상 대법관을 두 차례나 지낸 셈이다. 이 전 총리는 법관 재직 시절 독재정권의 입맛에 맞지 않는 이른바 '소수의견'을 많이 낸 걸로 유명한데 이 때문에 '대쪽 판사'라는 별명을 얻게 됐다.
한편, 이 전 총리는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3월 감사원장을 맡게 됐다. 취임 후 그는 그간 '성역'으로 일컬어지던 청와대 비서실은 물론 '율곡사업' '평화의 댐' 등과 관련해 국방부에 대한 감사를 강행했으며, 심지어 전두환·노태우 전직 대통령에 대해 서면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에 임명된 그는 역시 '법대로'를 주장하면서 헌법에서 위임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노력했다.
이 때문에 그는 김영삼 측근들과 갈등을 빚게 되었고 심지어 김영삼과도 수시로 충돌했다. 결국 김영삼 조차 이 전 총리를 부담스러워하게 됐고, 사임 형식으로 해임하려 했다. 그러자 그런 분위기를 감지한 이 전 총리는 "법적 권한도 행사하지 못하는 허수아비 총리는 안 한다"며 국무총리 취임 127일만인 1994년 4월 사표를 내고 말았다. 이로써 이 전 총리는 '대쪽'이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다시 한 번 각인시켰으며, 동시에 큰 인기를 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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