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10년에 청춘만 늙었구나

[노래의 고향 45]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일에 생각해보는 '용정'

등록 2013.07.24 11:26수정 2013.07.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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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용정중학교 게시판에 걸려 있는 학생들의 백두산 백묵 그림 ⓒ 정만진


1800년대 중순까지만 해도 만주는 찬바람 부는 허허벌판이었다. 그러던 곳이 조선 후기인 철종(1831~1863) 때부터 일제 강점기 사이에 사람 사는 농경지로 탈바꿈했다.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들어간 덕분이었다. 그 중에는 생계를 위해 두만강을 건넌 이도 많았고, 독립운동을 위해 고향을 버리고 이주한 이도 부지기수였다.

안동의 선비 이상룡. 1925년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역임하는 등 독립운동에 매진하다가 1932년 만주에서 서거한 이상룡 선생도 고향을 버리고 간도로 이주한 분이다. 그는 1911년 1월 고향 안동에서 노비문서를 불태운 뒤 이제 평민이 된 종들에게 "너희들도 이제부터는 독립군"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바로 50여 가솔들을 이끌고 만주로 들어가 일제와 싸웠고,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는 결코 내 유골을 고향으로 옮기지 마라"는 유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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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용두레우물. 우물 앞 기념비에는 이곳이 용정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고 적혀 있다. ⓒ 정만진

"독립 전엔 내 유골, 고향 보내지 마라"

윤동주의 가족도 함경도에서 두만강을 건너 이주한 이향민들이었다. 이주 초기 간도 이주민들이 가장 먼저 집단적으로 거주하기 시작한 곳은 용정. 많은 독립군들의 유적과 윤동주의 자취가 뚜렷해 한국 관광객들이 즐겨찾는 바로 그 소도시이다.

용정이라는 이름에는 용의 기운이 서려 있다. 지명 자체가 용우물 아닌가. 먹을 물을 마련하기 위해 이향민들은 거주지 일원 중심부에 깊은 우물을 팠고, 그 우물에 용두레우물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따라서 용정, 용두레우물 등은 우리 민족이 전통적으로 용을 좋아하고, 또 섬겨온 결과물인 셈이다.

우리 민족은 고장마다 그럴 듯한 못에 용소, 용연 등의 이름을 붙인 뒤 그곳이 용의 거주지라 믿었다. 당연히 무수한 사람들이 용꿈을 꾸었다. 고려 창업주의 이름에 '건(建)'이 들어간 것 또한 서해 용왕이 그의 할아버지 작제건에게 "너희 집안에 왕이 태어나도록 하려면 삼대에 걸쳐 이름에 '건'자를 넣도록 하라"고 가르쳐준 데 기인한다.

용 좋아하는 우리 민족, 간도에 마을 형성하고 '용정'이라 이름 붙여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용정 등 만주 일대를 공연단이 즐겨찾은 것이야 당연한 일이다. 1930년대 당대의 가수 고복수도 용정에 공연을 갔다. 막간에 잠깐 휴식을 즐기고 있는 그에게 낯선 30대 부인이 찾아왔다. 그녀는 자신의 고향이 부산이라며 집 주소를 고복수에게 주었다. 조선으로 돌아가거든 자신의 가족에게 안부를 좀 전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여인은 10년 전 남편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했다고 하였다. 그런데 남편은 죽고, 고향으로 돌아갈 차비도 없는 처지가 되었노라고 탄식했다. 고복수의 용정 공연이 끝나기도 전에 여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고복수는 작사가 김능인에게 이 안타까운 사연을 전했다.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 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갓흔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맥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압해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렷만
호들기를 꺽거 불든 그때는 옛날
타향살이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김능인의 이야기를 들은 손목인은 바로 그 자리에서 노랫말에 음률을 붙였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바로 그 유명한 <타향살이>. <타향살이>는 만주로 옮겨와 타향살이를 하고 있던 조선인들의 심경을 찢었다. 용정, 하얼빈 등지의 공연 때마다 노래를 부르는 이도 듣는 이도 눈물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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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 ⓒ 정만진


사람이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은 그에게 본래 고향이 있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고향에서의 삶이 지금의 생활보다 뭔가 좋았다는 사실까지 함의한다. 그리고 지금은 세월이 흘러 늙었거나, 늙어가고 있다는 애잔함까지도 의미한다.

게다가 식민지 시대, 잔혹한 일제의 정치적 경제적 수탈을 피해 간도로 넘어온 조선인들이었다. 저항하고 싸우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온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타향살이 몇 해련가 손꼽아 헤여 보니 청춘만 늙어'버렸다. 어찌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 생각해도 기가 막히지 않을 것인가.

만주 이주민들, 부평 같은 신세 한탄하며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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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피어날 제 매즌 인연도 / 코스모스 시드르니 그만이더라 ⓒ 정만진

물론 1939년에 나온 <코스모스 탄식> 같은 노래를 보면 간도 지방에서의 타향살이는 이제 조선인들에게 익숙해진 듯 보인다. 김해송이 곡을 붙인 이 노래의 가사는 <꿈꾸는 백마강>의 조명암이 썼는데, 두만강을 건너고, 용정 기차역에서 헤어지고, 해란강 주변을 거닐며 사랑을 속삭이는 일이 이미 그들에게 일상사가 되었음을 잘 드러내준다. 

코스모스 피어날 제 매즌 인연도

코스모스 시드르니 그만이더라
국경 없는 사랑이란 말뿐이러냐
우스며 헤여지든 두만강 다리

해란강에 비가 올 제 다정튼 님도
해란강에 눈이 오니 그만이드라
변함 업는 마음이란 말뿐이러냐
눈물로 손을 잡든 용정 플냇홈

두만강을 건너올 제 울든 사람도
두만강을 건너가니 그만이드라
눈물 업는 청춘이란 말뿐이러냐
한없이 흐득이는 나진행 열차

하지만 인생살이란 <코스모스 탄식>처럼 그렇게 '그만이드라' 하고 정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 쌓인 한은 병이 되고, 그것은 마침내 <타향살이>의 부산 여인처럼 죽음도 낳는다. 1960년대의 최희준 역시 <하숙생>을 통해 '인생은 나그네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물으면서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 인생은 나그네길 구름이 흘러가듯 정처없이 흘러서 간다'하고 노래했지만, 어디 인생이 '정처없이 흘러'가는 구름 같은 것이며, '정'도 '미련'도 두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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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의 '17인 순난 의사묘' 일부. 1919년 3월 13일 독립운동 때 순국한 분들을 모신 공동 묘역이다. ⓒ 정만진


용정에서 윤동주 생가를 본다. 그가 다녔던 명동교회, 용정중학교도 둘러본다. 시내 중심가의 용두레우물은 물론이다. 1919년 3월 13일 만세운동을 펼치다가 순국한 분들의 '순난(殉難)의사묘'도 찾아본다.

그러나 나는 여행자이지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이향민은 아니다. '현대인은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라는 정의가 말해주는 것처럼, 현대인은 근본적으로 도시문명에 젖어 어디에서 거주하나 별다른 이질감을 느끼지 않는 존재이다. 따라서 출생지인 농촌 마을을 1968년에 떠나온 이래 줄곧 대도시 생활을 해온 나 역시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추억에 젖어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어럽게 살다간 독립군들, 간도 이주민들, 우리 역사는 기억하고 있나?

그렇다면, 스스로 바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지난 세월 간도 이주민들의 심사를 지금 와서 누가 진정으로 헤아려줄 수 있을까. 찢어지는 가난에 고통받으며 살다가 <타향살이> 노래를 들으며 눈물을 쏟고, 마침내 자진까지 한 그 시대 조선인들의 한을 같은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특히, 고향도 가족도 버리고 간도로 와서 일제와 싸우다가 어딘지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독립운동가들의 생애는 또 누가 기억하고 있을까. 함께 항일투쟁을 하던 두 동지가 마적에게 총살당하였다는 비보를 듣고 한탄하며 식음을 삼키지 못하다가 마침내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면서 "나라가 독립할 때까지는 결코 내 유골을 고향으로 옮기지 마라"는 유언을 남긴 이상룡 선생을 아는 이 도대체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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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백범기념관 벽에 좌우로 나란히 걸려 있는 이상룡, 이승만 사진. ⓒ 백범기념관


서울의 백범기념관에 가면 이상룡 선생과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사진이 좌우로 나란히 벽에 붙어 있다. 모든 국민들이 이승만 이름 석자를 알지만, 대부분의 국민들은 이상룡을 거의 모른다. 나는 두 사진 앞에서 생각에 잠긴다.

이승만, '대통령', '독재', '한강다리 폭파'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위인'이다. 그는 우리나라 아이들에게 읽히는 위인전에 드물지 않게 등장한다. 그의 행적을 비판하다가는 열렬 추종자들로부터 돌연스런 공격을 당하기 십상이다.

나는 두 사람의 사진 앞에 선 채, 하늘에서 분단 조국을 지켜보며 여전히 정신적 타향살이를 하고 계시는 이상룡 선생을 떠올리다가, '위인 이승만'이라고 할 때의 위인은 위인(偉人)일까, 아니면 보통의 뜻인 위인(爲人)일까, 엉뚱한 헷갈림에 빠져든다. 이승만 일파에게 암살당한 김구 선생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흰옷을 입으신 채로 백범기념관 중앙현관에 버티고 계시는데,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갈피도 잡지 못하는 채로 마냥 오락가락하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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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생가의 마루 ⓒ 정만진


덧붙이는 글 1948년 7월 24일, 우리나라에 초대 대통령이 취임한 날입니다. 그 며칠 전인 7월 20일 국회에서 무기명 투표로 대통령을 뽑았는데, 이승만 당선자가 선출되었습니다.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안재홍 2표, 서재필 1표였습니다. 오늘 2013년 7월 24일, 그 일을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용정 #이상룡 #윤동주 #이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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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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