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문화의전당 제6차 '김해를 빛낸 예술가' 시리즈 전시회 때 걸렸던 <홍도야 울지 마라>의 영화 포스터. 1939년 영화의 것은 아니다.
김해문화의전당
사랑을 파고 사는 꽃바람 속에
너 혼자 직히라는 순정의 등불홍도야 울지 마라 오빠가 있다안해의 나갈 길을 너는 직혀라구름에 싸힌 달을 너는 보았지세상은 구름이오 홍도는 달빛하늘이 믿으시는 네 사랑에는구름을 걷어주는 바람이 분다 홍도야 울지 마라 굿세게 살자진흙에 핀 꽃에도 향기는 높다네 마음 네 행실만 놉게 가즈면즐겁게 우슬 날이 찾아오리라1936년 7월 23일, 악극형 연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 1948년 월북함으로써 이름을 잃었지만 당대의 천재로 명성을 날리던 임선규가 극본을 쓰고, 극단 청춘좌가 상연한 이 연극은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한국가요사1>을 집필한 박찬호가 '조선 연극사상 최고의 장기 공연을 기록했다'고 평가하는 것을 보면 그 인기는 애써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
박찬호에 따르면, 한창 연극이 공연되던 어느 날은 서울 시내의 요정들이 모두 문을 닫았다고 한다. 기생들이 한꺼번에 연극 구경을 오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는 증언이다. 이는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의 저자 선성원도 '홍도의 이야기가 자신의 처지와 너무나 닮았다고 공감한 기생이 그만큼 많았던' 까닭에 '공연되는 동안에는 장안의 술집이 모조리 문을 닫았다고 한다'고 유사하게 기술한다. 그만큼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것이다.
이윽고 연극은 1939년 영화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4월 음반도 발매되었다. 사람들은 영화를 보면서 울고, 노래를 듣고 부르면서 또 눈물을 훔쳤다. 하지만 김영춘이 부른 <홍도야 울지 마라>는 영화의 주제곡이 아니었다. '부'주제곡이었다. 게다가 연극도 영화도 제목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홍도야 울지 마라>가 아니었다. 뒷날 연극과 영화의 제목이 <홍도야 울지 마라>였던 것으로 광범위하게 착각 현상이 일어난 데에는 부주제곡이었던 노래가 너무나 인기를 끈 탓이었다.
주제곡도 아니고 영화 제목도 아닌 '홍도야 울지 마라'연극과 영화의 제목도 아니고, 주제곡도 아니었지만, 그런데도 <홍도야 울지 마라>는 남일연이 부른 '본'주제곡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보다 훨씬 더 높은 인기를 모았다. 어째서 그런 결과가 나타났을까? 연극과 영화의 줄거리를 보자.
부모 별세 이후 오빠의 출세를 위해 스스로 홍도는 기생이 되고, 고생 끝에 오빠를 졸업시킨 홍도는 화류계를 벗어나 시집을 간다. 남편은 유학을 떠나고, 홍도의 신상을 나쁘게 여기는 시어머니는 홍도를 쫓아낸다. 홍도는 줄곧 남편을 기다리지만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은 어머니의 말만 듣고 부잣집 딸과 재혼을 한다. 홍도는 칼을 들고 결혼식장으로 달려가고, 경찰관인 오빠가 그녀의 손목에 수갑을 채운다. (그래도 홍도만은 오빠가 자신을 믿어줄 것이라 생각하고, 오빠 또한 홍도의 억울함을 익히 헤아린다.)김영춘이 부른 <홍도야 울지 마라>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스토리텔링'을 노랫말 안에 담았다. 연극과 영화를 본 사람들은 가사를 흥얼거리는 것만으로도 홍도의 슬픈 사연을 구구절절하게 마음에 재현할 수 있었다. 노래를 부르고 듣는 것만으로 또 다시 눈물이 났다. 그러나 노래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그렇지 못했다.
거리에 핀 꽃이라 푸대접마오마음은 풀은 하늘 힌구름 같소짖구즌 비바람에 고닲이 우다사랑에 속았다오 돈에 우렀소사랑도 믿지 못할 쓰라린 세상무엇을 믿으랐가 아득하구료억울한 하소연도 설은 사정도가슴에 서려 담고 울고 살닛가계집의 높은 뜻이 꺾이는 날에무엇이 앗가우랴 거리끼겠소눈물도 인정조차 식은 세상의때 않인 시달림에 꽃은 집니다.이고범이 작사하고 김준영이 작곡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본주제곡이었는데도 부주제곡 <홍도야 울지 마라>에 밀렸다. 이는 음률은 제외하고 가사만 보아도 짐작이 되는 일이다. <홍도야 울지 마라>와 달리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스토리텔링이 없다. 당장 홍도의 이름도 나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