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고독'이 없는 가짜 혁명을 향한 조사(弔詞)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47] <푸른 하늘을>

등록 2013.08.06 09:22수정 2013.08.06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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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웠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1960. 6. 15)

선생님, '로베스피에르'(1758~1794와 '당통'(1759~1794)이라는 이름을 들어 보셨는지요.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영웅'들입니다. 이들은 불꽃 튀는 혁명의 와중에 우정과 권력 투쟁의 그물에 휩싸이는 비운의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저는 이 시에서 혁명의 영웅이자 비극적인 생의 주인공들인 그 두 사람을 떠올립니다.

애초 이들은 프랑스 혁명기의 급진적인 개혁 세력인 자코뱅 파를 이끌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꿈꾸었던 사회의 모습은 서로 달랐습니다. 로베스피에르가 엄격한 원칙을 바탕으로 한 이상적인 도덕 사회를 갈구했다면, 당통은 중용적인 태도와 화합을 바탕으로 현실 속의 평범한 인간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로베스피에르는 혁명기의 급진 좌파를, 당통은 중도파를 대변하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이들 두 사람은 이처럼 정치적인 태도가 달랐지만 똑같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합니다. 당통은 혁명의 동지였던 로베스 피에르에 의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1794년 4월). 로베스 피에르는, 그 자신이 주도한 자코뱅 정부의 공포정치를 진압하고 들어선 테르미도르 반동 정부에 의해 자신의 반대파들이 처형당한 곳에서 죽음을 맞이합니다(1794년 7월).

혁명 재판부 앞에 선 당통은 이렇게 말합니다.


"더 이상 나 자신을 변호하지 않겠다. 나에게 죽음을 내려라. 그러면 영광스럽게 잠들겠다."

그는 혁명적인 무산 대중인 '상퀼로트(sansculotte:과격 공화파)와 교분을 맺으면서 그들의 정서를 함께 나눴습니다. 관대함과 관용의 태도로 보통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했습니다. 음모와 배신이 횡행하는 혁명기의 정치를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 맞추려고 했습니다.


당통이 죽은 지 3개월이 지난 7월 27일, 테르미도르 반동 정부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일파를 체포합니다. 이후 반동 정부는 3일간 104명의 로베스피에르파를 처형합니다. 곧 프랑스 전역에서 공포 정치의 주역이었던 자코뱅당에 대한 백색 테러가 자행됩니다. 로베스피에르 역시 테르미도르 반동 정부의 반란이 일어난 지 이틀째인 7월 28일에 혁명 광장(콩코드 광장)에 설치된 단두대에 올라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후에 그는 피에 굶주린 야수이자 소심한 부르주아로 비난을 받았으나 19세기에 들어서면 박해 받은 애국자로 재평가됩니다.

선생님, 그들은 서로 다른 시기에 서로 다른 이유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피를 혁명의 제단에 바쳤다는 점에서 같은 생애를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한 사후의 역사적인 평가가 양 극단을 오가며 부침을 거듭했던 점도 비슷합니다. 한 마디로 그들은 똑같이 30대 중반의 나이에 요절한 뜨거운 혁명가였습니다.

선생님, 그들이 죽음을 맞이하면서 떠올린 생각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단두대 아래로 고개를 들이밀 때, 그들은 어떤 모습의 인간 세상을 꿈꾸었을까요. 그들은 과연 그 죽음의 문턱에서 혁명으로 이루고자 했던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세상이 도래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을까요.

선생님께서는 "자유를 위해서 /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 사람"(2연 1~3행)에 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사람'들은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2연 7, 8행)음을 잘 압니다.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2연 9, 10행)지, 아니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3연 2행)지를 그들은 너무나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피'와 '고독', 이들이야말로 이 시에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진정한 '자유'와 '혁명'의 전제 조건이겠지요.

선생님,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죽음을 맞이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죽음은, 선생님께서 이 시에서 설파한 '자유'와 '혁명'을 위한 싸움의 어려움을 말해 줍니다. 자유와 혁명은 '죽음'이 아니고서는 결코 이루지 못합니다. 이 '죽음'은 당통이나 로베스피에르가 보여주었던 육체의 죽음이기도 하고, 그들이 맞서 싸우려고 했던 모든 비인간적이고 반혁명적인 것들, 가령 상식과 평범을 벗어난 극도의 공포 정치(당통 등의 반대파들이 문제삼은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태도)나 원칙을 무시하는 지나친 현실주의(로베스피에르가 문제삼은 당통의 정치적 태도)로 대변되는 정신의 죽음이기도 하겠지요.

그런데 4월 혁명 이후에 펼쳐진 현실은 어떠했습니까. 선생님께서 이 시 직전에 쓰신 <육법전서와 혁명>에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합법적으로 불법을 해도 될까 말까한" 혁명은 지지부진하기만 했습니다. 일소되어야 할 반혁명분자들인 '그놈들'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고 있"(2연 1행)었습니다. 그 때문에 "불쌍한 백성들"(1연 6행)은 "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 / 고생"(1연 15, 16행)만 하고 그 어떤 것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처럼, "혁명이란 / 방법부터가 혁명적이어야"(1연 3, 4행) 합니다. "혁명의 육법전서는 오로지 '혁명'밖에는 없"(3연 14행)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은 '혁명'은 가짜 혁명일 테지요. 혁명을 빙자한 반동이겠지요. 하지만 "혁명이란 단자는 학생들의 선언문하고 / 신문하고 / 열에 뜬 시인들이 속이 허해서 / 쓰는 말밖에"(3연 8~11행) 안 되었기 때문일까요. 그토록 진짜 혁명을 힘주어 부르짖은 <육법전서와 혁명>의 잉크가 채 마르기도 전에, 선생님께서는 이 시를 세상에 내놓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자유에 뒤따르는 "피의 냄새"와 '고독'을 말씀하셨습니다.

<육법전서와 혁명>에서 "혁명의 육법전서는 '혁명'밖에"는 없다고 외치시던 선생님의 분노 어린 목소리에는, 아직 혁명에 대한 일말의 기대가 남아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이 시에 오면 그런 기대가 거의 사라진 듯합니다. 저는 '자유'와 '혁명'은 '피'와 '고독'과 함께 한다는 이 시의 반복적인 진술 속에서, 역설적으로 '피'와 '고독'이 없는 '가짜 혁명'의 위험에 대한 통렬한 경고를 읽었습니다.

선생님, 1794년의 4월과 7월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그때 그 시간으로 가서 단두대 아래에 목을 늘어뜨린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머릿속을 헤집어봅니다. 그 머릿속에서 그들은 아마도 진정한 자유와 평등의 참세상을 그리고 있었겠지요. 그런 생각이 있었기에 그들은 기꺼이 자신의 머리를 혁명의 제단 앞에 바칠 수 있지 않았을런지요.

그런데 저는 그들이 머릿속으로 그렸을 참세상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습니다. 그들이 '피'를 흘리면서 갈구했을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 도대체 어떤 것인지 감을 잡을 수가 없습니다. "승리의 화요일"(4월 26일)의 흥분이 너무나도 일찍 사라졌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피의 냄새가 섞여 있"지 않은 '자유'와, 결코 고독하지 않은 '혁명' 사이에서 세상이 갈팡질팡하고 있었기 때문일까요.

선생님의 시 <푸른 하늘을>은 이 모든 질문에 대해 그 어떤 답도 주지 않습니다. 다만 선생님께서는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혁명은 고독한 것", 혹은 "혁명은 고독해야 하는 것"이라는 당위적인 명제만 거듭 강조하십니다. 그렇다면 극한의 고독으로서의 죽음에 직면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도 분명히 그려보았을 그 "피와 고독의 혁명론"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피'는 과거 자신과의 철저한 결별을 상징합니다. 그 결별의 과정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자기 희생으로서의 '피'가 아니겠는지요. 이것은 '고독'이 과거에 만들어진 모든 인간적 ․ 사회적 관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그 결별과 단절 속에서 개인과 사회에 건재하는 구시대의 모든 잔재들이 사라질 수 있지 않을런지요. 4월 혁명이 추구한 진정한 '정신 혁명'도 이런 과정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겠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4월 혁명은 그렇게 진행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제게 <푸른 하늘은>은 혁명의 고양(高揚)이 아니라 추락에 대한 우울한 조사(弔詞)로 다가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푸른 하늘을>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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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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