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는 어린이들(1950. 11.).
NARA, 눈빛출판사
운명그날 밤 준기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살아 온 2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세 동생들, 어릴 때 친구와 소학교, 중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전선에서 만났던 최순희 전사, 문명철 중좌, 장남철 상사, 남진수 중사, 윤성오 상등병…. 여러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그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지금 자고 있는 행랑채 방에 남아 있는 듯한 순희의 체취가 그날 밤 더욱 준기를 잠 못 이루게 했다. 그때 순희의 포동포동한 젖무덤은 잘 익은 백도 복숭이와 같았고, 젖꼭지는 새까맣게 익은 오디처럼 달콤했다. 준기는 그날 그 순간만 생각하면 갑자기 맥박이 요동쳤다.
준기는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한국전쟁을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지고 울화가 치밀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했으면 당연히 일본이 분단되었어야지 왜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을까? 분단된 우리 백성들은 왜 한 하늘에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을 겨누어야만 했을까? 이런 싸움을 부추긴 미소 강대국이 원망스럽다가도, 들뜬 전쟁 분위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불쑥 자원입대한 자신에게도, 그리고 한 여인의 말에 전선을 뛰쳐나온 자신의 귀가 엷은 데도 그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북에 남았더라도, 지난 전쟁 중에 가족과 헤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고, 그때 인민군에 자원입대치 않았더라도, 어떤 구실로도 전쟁터에 끌려 갔을 것이다. 만일 유학산에서 순희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전선에 남았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자기는 거기서 죽었거나, 아니면 별 수 없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자신의 삶은 홍수가 나서 어쩔 수 없이 큰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수박덩이처럼 피할 수 없었던 어떤 운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