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대에서 일했습네다" 그의 동공이 갑자기 커졌다

[박도 장편소설 <어떤 약속>](51) #14. 구미 ②

등록 2013.09.26 11:02수정 2013.09.26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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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피난민 천막촌(파주, 1952. 9,).

피난민 천막촌(파주, 1952. 9,). ⓒ NARA, 눈빛출판사


나 좀 도와주시오

"그래 이제 어데로 갈 겁니까?"
"……."
"이남에는 가족이나 일가친척들이 있습니까?"
"… 없습네다."


준기의 대답에 힘이 없었다.

"지금 우리 고장에도 지난 전쟁으로 가족을 잃거나 피난, 또는 월남으로 외톨이가 된 채 머물고 있는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기럴 겁네다. 남선 가는 곳마다 월남동포들이 수태(숱하게) 많디요. 오죽하면 '일가친척 없는 몸이 지금은 무엇을 하나'라는 노래까지 나왔겠습네까."
"그래 그 사람하고 서로 약속은 하고 헤어졌습니까?"
"기래시우. 서울 덕수궁 대한문에서 만나기루 …. 언젠가는 그 사람을 찾을 테디요."
"그럴 날이 오겠지요. 이제 곧 날도 저무는데 어데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우리 집 이 방에서 하룻밤 묵고 가이소. 육이오 전에는 머슴들이 이 방에 거처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비어 있습니다."
"고맙습네다. 이러케 방까디."

준기는 앉은 채로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래 군에서는 주특기가 무엇이었습니까?"
"의무대에서 일했습네다. 육군 중사로 제대했디요."
"아, 그래요."

김교문은 무척 반가운 듯 갑자기 동공이 커졌다.


"국군에 입대하기 전, 인민군 시절에는 위생병이여시오(이었습니다)."
"아, 그러면 병원 일은 잘 알겠네요."
"군대에서 부상병들 붕대 감고, 주사 놓는 일은 수태 했습네다."
"어디 마땅히 갈 곳도, 일거리도 없다면, 나 좀 도와주시오."
"……."

김교문은 진지한 얼굴로 김준기에게 도움을 청했다.


"나는 수의사요. 얼마 전에 구미 장터에 가축병원을 냈는데 일손이 마이(많이) 딸려요. 내가 일주일에 이틀은 대구에 있는 경북대 대학원에서 강의를 들어야 하기에 병원 운영에 어려움이 많아요."
"하룻밤 자면서 생각해 보디요."
"이것도 인연인데 그만 우리 고장에서 나와 같이 삽시다. 사람이 오래 살다보면 타향도 내고향처럼 정이 듭니다."
"알가시우. 내일 아침에 말씀 드리디요."
"그라이소. 아무튼 나는 김씨가 우리 집 식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깊이 생각해 보디요."

a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는 어린이들(1950. 11.).

트럭에 실려 고아원으로 가는 어린이들(1950. 11.). ⓒ NARA, 눈빛출판사


운명

그날 밤 준기는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동안 살아 온 2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세 동생들, 어릴 때 친구와 소학교, 중학교 선생님들, 그리고 전선에서 만났던 최순희 전사, 문명철 중좌, 장남철 상사, 남진수 중사, 윤성오 상등병…. 여러 사람들에 대한 추억들이 뭉게구름처럼 피어나고, 그들의 안부가 궁금했다.

지금 자고 있는 행랑채 방에 남아 있는 듯한 순희의 체취가 그날 밤 더욱 준기를 잠 못 이루게 했다. 그때 순희의 포동포동한 젖무덤은 잘 익은 백도 복숭이와 같았고, 젖꼭지는 새까맣게 익은 오디처럼 달콤했다. 준기는 그날 그 순간만 생각하면 갑자기 맥박이 요동쳤다.

준기는 자신의 운명을 뒤바꿔 놓은 한국전쟁을 생각할수록 억장이 무너지고 울화가 치밀었다.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했으면 당연히 일본이 분단되었어야지 왜 한반도가 분단이 되었을까? 분단된 우리 백성들은 왜 한 하늘에 살 수 없는 원수처럼 서로 총을 겨누어야만 했을까? 이런 싸움을 부추긴 미소 강대국이 원망스럽다가도, 들뜬 전쟁 분위기에 앞뒤 가리지 않고 불쑥 자원입대한 자신에게도, 그리고 한 여인의 말에 전선을 뛰쳐나온 자신의 귀가 엷은 데도 그 책임이 있었다.

하지만 자기가 북에 남았더라도, 지난 전쟁 중에 가족과 헤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을 것이고, 그때 인민군에 자원입대치 않았더라도, 어떤 구실로도 전쟁터에 끌려 갔을 것이다. 만일 유학산에서 순희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전선에 남았다면, 아마도 십중팔구 자기는 거기서 죽었거나, 아니면 별 수 없이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자신의 삶은 홍수가 나서 어쩔 수 없이 큰물에 휩쓸려 떠내려 가는 수박덩이처럼 피할 수 없었던 어떤 운명이었다.

a  유엔군 병사가 고아원을 찾아 원생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다(포항).

유엔군 병사가 고아원을 찾아 원생들에게 초콜릿을 나눠주고 있다(포항). ⓒ NARA, 눈빛출판사


대한문

준기가 남쪽에 홀로 남아 사는 가장 큰 의미는 최순희 누이를 만나는 일이었다. 그래서 준기는 국군 복무 중에도 해마다 8월 15일이면 특별 외출을 허락받아 서울로 간 뒤 덕수궁 대한문에서 순희 누이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준기는 1954년, 55년 두 해 8월 15일 날 대한문 앞에서 군복을 입은 채 기다렸지만 순희 누이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1956년 8월 15일은 제대 후 사복을 입고 대한문에서 마냥 기다렸다. 그래도 끝내 최순희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그날은 민간인 신분이라 행동도 자유롭고, 시간도 있기에 오후 늦은 시간 평소 순희가 자기네 가족이 살았다고 말하던 서울 종로구 원서동에도 찾아가 초저녁까지 수소문을 해 보았다.

하지만 간신히 찾은 한 동네 할머니는 순희네가 전쟁 중 한밤중에 어디로 떠나간 뒤 그 이후로는 당신도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준기는 아마도 순희 누이가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다른 사내와 결혼을 하였기에 이날을 알면서도 나타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순희 누이가 세상살이가 고달파서 올해는 그냥 넘겼을 거라고, 늘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번번이 발길을 돌렸다.

준기가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고 있는데 바깥에서 인기척이 났다. 수의사 김교문이었다.

"김씨, 자요?"
"아닙네다."
"그러면 안채 대청으로 건너오시오. 방금 아버님 제사를 모셨기에 나랑 같이 음복이나 합시다."
"아, 예."

a  오늘의 덕수궁 앞 대한문(2013. 6. 26.).

오늘의 덕수궁 앞 대한문(2013. 6. 26.). ⓒ 박도


음복

준기는 겉옷을 챙겨 입고 안마당을 건너 안채 대청으로 갔다. 이미 대청마루에는 음복상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 동네는 이달에 제사 안 지내는 집이 거의 없어요. 음력 칠월 초사흘 날에는 동네 합동제사를 지내야 할 만큼 지난 전쟁 때 일백여 명이 한꺼번에 떼죽음을 당했지요. 육이오 때 광복절 다음날 구미 약목 일대의 B-29 전폭기들의 융단폭격 때문이지요. 제 아버님도 그때 크게 부상을 입고 한 열흘 고생하시다가 그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내레 그날은 잘 외우고 있습네다. 기때 임은동 야전병원에서 폭격으로 죽을 뻔했디요."
"아, 네. 그랬군요. 임은동 왕산가에 인민군 야전병원이 있었지요."
"내레 누구네 집인 줄은 잘 모르갓으나 왜정 때 혁명렬사 집이라는 말은 들어시오."
"그 왕산 어른은 저희 조부와도 세교가 깊었던 분으로, 조선이 망하기 전 13도 창의군 대장을 하셨지요. 그 어른이 의병을 이끌고 서울 진공에 앞장서시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들려 끝내 서대문 감옥에서 순국했지요."
"말씀 듣고보니 덩말 이곳은 충덜의 고장입네다. 긴데 기때 폭격으로 거(그) 집은 죄다 불타버렛디요."
"그럼요, 그때 하늘에서 비행기가 쏟은 폭탄이 마치 우박처럼 쏟아졌지요."
"기럼요, 기런 가운데 살아난 게 탐(참) 용하디요."

순간 준기는 그날을 되새겼다.

그날 정오 무렵 준기는 아침밥도 먹지 못한 채 야전병원 본부 수술실에서 의료기구를 닦고 있었다. 그때 순희 동무가 자기를 불렀다.

"김 동무, 의료기구는 나중 닦고 우선 밥부터 먹읍시다."
"알가시오."

그들이 본부 수술실에서 막 나와 취사장으로 가는데 B-29 폭격기의 요란한 굉음이 귀를 때렸다.

"동무우!"

준기는 순희의 팔을 잡아당기고 곧장 야전병원본부 뒤 대나무 숲으로 튀었다. 잠깐 사이 야전병원 일대는 B-29 폭격기의 융단폭격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만일 준기가 야전병원본부 수술실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문명철 야전병원장과 행정반 손만호 전사와 함께 그 자리에서 즉사했을 것이다. 준기는 그날을 회상하자 순희 누이와 자기는 서로 생명을 구한 사이로 서로의 인연은 어떤 '운명'임을 다시 느꼈다.

김교문이 잔에다 제삿술을 따라 건넸다.

"다행히 우리 가족들은 금오산으로 피난해 화를 면했는데, 그날 그때 아버님은 동네 불이 난 것을 보고, 불 끄신다고 내려가시다가 그만 유탄에 맞아 여러 날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아, 예. 기때는 정말 죽고 사는 게 한 티 한 끗 차이였디요."
"그랬지요. 그때 피난 가지 않고 마을에 있었던 사람은 거의 죽거나 크게 다쳤습니다. 그때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지요."
"기럼요, 기때 유학산은 온통 시체로 뒤덮였디요. 내레 기때 거기를 도망티디(치지) 않았더라면 아마 유학산 까마귀 밥이 되었을 겁네다."

준기는 음복 술잔을 천천히 비우며 담담히 말했다.

개똥밭에 굴러도

"우야든동 그때 잘 도망쳤습니다. 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하지요."
"길쎄요. 아무튼 선생은 육이오 전란으로 아바님을 잃어 상심이 크시겠습네다."
"그럼요, 우리 집이 이렇게 밥술이나 먹는 것도 다 아버님 덕분입니다. 아버님은 어찌나 근검절약을 하셨든지, 겨울철에는 홍시 하나로 한 끼를 때우셨지요.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는 생선 장수가 우리 집에는 좀처럼 생선을 사지 않자 어느 겨울날 미끼로 안마당에 조기 한 마리를 던졌습니다. 그러자 아버님은 밥도둑 들어왔다고 그 조기를 도로 담 밖으로 내던지신 분이었어요." 
"대단한 구두쇠이셋구만요."
"그럼요. 그렇게 근검절약한 덕분에 우리 가족은 보릿고개에도 부황으로 고생하거나 굶어죽은 사람이 없었고, 우리 형제들이 공부를 할 수 있었지요. 아버님은 자신에게는 그렇게 구두쇠라도 남에게는 후하셨지요."
"아, 네."

김교문은 그날이 아버님 제삿날이라 본댁에서 지낸다고 하면서 보통 때는 구미 장터 가축병원에서 잔다고 했다. 준기는 출출한데다가 정성스럽게 차린 탓인지 음복 상을 깨끗이 비웠다.

a  포로수용소 이발병이 포로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부산, 1951. 1. 22.).

포로수용소 이발병이 포로의 머리를 깎아주고 있다(부산, 1951. 1. 22.). ⓒ NARA, 눈빛출판사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배경 현장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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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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