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부대에서 지내는 두 소년, 그 무렵에는 이들을 ‘하우스보이’라고 하였다. 이들 가운데는 미군에게 입양되어 태평양을 건너기도 하였다(전주, 1951. 3. 1.).
NARA, 눈빛출판사
구미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의 구미는 인구 일만 명 남짓한 자그마한 면소재지로 보통급행열차도 서지 않는 가난한 시골이었다. 구미 면민들은 대부분 농사꾼이었는데, 해마다 반복되는 가뭄과 낙동강이 넘치는 홍수로 피땀 흘려 애써 농사를 지어도 세 끼 밥 먹는 집은 드물었다.
해마다 봄철이면 가뭄으로 모내기가 힘들었고, 여름철에는 안동 처녀가 낙동강에다 오줌만 눠도 홍수가 진다고 할 만큼 잦았다. 그런 만큼 해마다 가뭄과 홍수가 반복됐다. 비가 며칠만 내려도 낙동강이 범람하여 애써 지은 농작물을 강물에 다 떠내려 보냈다. 그러다가 가뭄이 조금만 계속 되면 논바닥은 거북 등처럼 좍좍 갈라졌다. 이러다 보니 농사꾼들은 늘 하늘을 쳐다보며 그해 풍년을 빌면서 살았다.
구미 면민 대부분은 의식주 중, 어느 것 한 가지도 넉넉한 게 없었다. 입은 옷은 남루하기 짝이 없었다. 먹는 음식도 조악하여 하루 한두 끼니는 밥보다 죽이나 국수, 호박범벅 등을 먹었고, 밥에도 곡물을 아끼려고 무나 콩나물을 넣거나 감자나 고구마 같은 걸 넣어 대용식으로 먹었다. 심지어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거르고 난 뒤에 남은 술 찌꺼기로 주린 배를 채우는 사람도 많았다. 사는 집은 거의 대부분 초가집이었는데, 그나마 한국전쟁으로 반 이상 불타버리거나 허물어져 전쟁이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복구치도 못했다.
그 무렵 취사와 난방은 모두 나무로 하다 보니 언저리 산은 대부분 나무가 없는 붉은 민둥산이었다. 해마다 나무를 심어도, 그 나무가 자라기도 전에 뿌리까지도 캐어다 아궁이에 집어넣었다. 그나마 이 고장에는 금오산이 있었기에 언저리 사람들은 그 산에서 나물을 뜯어 봄철 보릿고개도 넘기고, 나무둥치를 베다가 장작도 마련하여 살림에 보태고, 한 겨울 추위도 견뎌낼 수 있었다. 구미사람들에게 금오산은 먹을 것과 땔감은 주는 보배로운 산이었다.
이렇게 가난한 고장이다 보니 가축병원을 찾아오는 이는 별로 없었다. 사람이 아파도 병원을 찾지 못하고 참고 견디는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나 돼지가 웬만큼 아파도 찾지 않았다. 그래서 가축병원에서는 종돈과 종우를 길러 교배를 시켜 주고 수입을 올리거나 인근 도축장에서 소 껍질을 모아 약품처리를 하여 가죽가공으로 병원을 운영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