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수영도 '나 돌아가리라' 외쳤다고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61] '신귀거래 1~9' 연작시

등록 2013.11.04 15:24수정 2013.11.04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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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놈이 무엇이지?
― 신귀거래 9


여행을
안 한다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도 없다
밀모(密謀)는
전혀 없다
담배마저 안 피우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때에는
성급해지면
아무 데나 재를 떠는
이 우주의 폭력마저
없어질지도 모른다
정적(靜寂)이
필요 없다
그 이유를
말할 필요도 없다
낚시질도
안 간다
가장(假裝) 파티에
가본 일도 없다
하물며
중립사상연구소에는
그림자도 비친 일이 없다
뇌물은
물론 안 받았다
가지고 있는
시계도 없다
집에도
몸에도
그러니까
the reason why
you don't get
a clock
or
a watch마저
말할 필요가 없다
집에도
몸에도
이놈이 무엇이지?
(1961. 8. 25)


<귀거래사(歸去來辭)>는 중국 송나라 때의 시인 도연명(陶淵明, 365~427)이 41세에 지은 작품이다. 벼슬을 마치고 향리로 돌아가 살겠다는 뜻을 읊은 이 작품에는 전원 회귀와 물아일체의 사상 등이 담겨 있다. "돌아가련다. 장차 전원이 거칠어지려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아니하랴(歸去來兮 田園將蕪 胡不歸)"라는 도입구가 이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한편으로 <귀거래사>는 현실도피적인 태도도 담고 있다. 관복을 벗고 자연이 있는 향촌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일체의 사회적 책무를 벗어던진다는 것이다. 사회적 자아로서의 삶으로부터 떠난다는 것이다. 자연으로의 회귀가 주는 삶의 낭만성 이면에 뜨거운 현실로부터 벗어난다는 소극적인 도피가 숨어 있는 것이다.

'신귀거래'라는 제목이 붙은 김수영의 작품은 모두 아홉 편이다. 그래서 '신귀거래'는 연작시다. 첫 작품 <여편네의 방에 와서>가 쓰인 것은 1961년 6월 3일이다. 연작시의 마지막에 해당하는 <이놈이 무엇이지?>는 1961년 8월 25일에 쓰였다. 약 세 달에 걸친 기간에 아홉 편을 썼으니 평균 열흘에 한 편꼴이다. 평소 김수영의 창작 패턴에 비춰 보면 상당히 빠른 속도다.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신귀거래' 연작의 주제의식은 <귀거래사>의 소극성과 관련된다. 그 소극성은 현실 도피와 이에 따른 밀실로의 퇴행에서 드러난다. 진짜 '시원함'과 '자유'에 관한 반어시인 <격문>은 가짜 시원함과 가짜 자유에 대해서 노래한다. '점점 어린애'처럼 성적 불능의 상태에 놓여 있는 <여편네의 방에 와서>의 화자는 '여편네의 방'에서 은둔자처럼 지낸다. <등나무>의 화자는 '무휴(無休)의 태만의 혼'을 가진 채 꼬인 등나무처럼 혼란속에서 시간을 보낸다.

'술 취한 고양이'가 등장하는 <술과 어린 고양이>에서 화자는 '술 취한 바보의 가족과 운명'을 이야기하면서 술을 마신다.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나름의 뚜렷한 원칙과 기준에 따라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모르지?>의 화자 역시 자신의 세계에 갇혀 술잔을 기울인다. <복중>의 화자는 '소리'를 갈급하면서 몸부림친다. 그는 지금 '너무 조용해서' 미치고 말 것 같은 밀폐의 삶을 살고 있다.


연작 7, 8번째에 해당하는 <누이야 장하고나!>와 <누이의 방>에서는 공통적으로 '누이의 방'이 등장한다. 그 방에는 실종된 동생의 '죽음'이 있다. '정돈될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평면' 같은 것들이 존재한다. '죽음'과 '평면'은 결코 어울리는 한 쌍이 아니다. 하지만 적막하면서도 정돈된 '누이의 방'에서 그것들은 하나가 된다. 현실을 바로 보지 않으려는 김수영의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말이다(<누이야 장하고나!> 1연 7~9행 참조).

'신귀거래 1~9' 연작에서 엿보이는 김수영의 태도는 자조와 냉소와 현실 외면이다. 김수영은 지금 '귀거래'의 본뜻에 맞추어 철저하게 현실로부터 벗어나려고 한다. 아이가 되고, 자조하며, 술을 마시거나 적막한 공간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면서 말이다.


어쩌다가 이렇게 돼버렸을까. 4월 혁명에 그토록 달떠 있던 그의 목소리는 다 어디로 가버렸을까. 혁명에 대한 한 가닥 믿음을 결코 놓지 않았던 그의 희망은 왜 사라진 걸까. 즐거운 일상의 혁명을 선동하던 그의 유쾌한 모습은 도대체 언제 사라졌을까.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육군 소장 박정희가 이끄는 쿠데타군이 한강을 건너 서울 시내에 진입했다. 일사분란하게 중앙청과 서울중앙방송국 등 주요 목표 지점을 점령한 쿠데타군은 새벽 5시에 6개 항으로 이루어진 '혁명 공약'을 발표하는 것으로 쿠데타의 일성을 알렸다. 오전 9시의 전국 비상계엄과 오후 7시의 장면 정권 인수 발표로 박정희의 쿠데타는 완벽한 성공을 이루었다.

그 5·16 군사정변이 발발한 직후, 김수영은 홀연히 자취를 감추었다. 가족 중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였다. 그의 행방불명은 시인 서정주와 조지훈이 쿠데타군에게 연행돼 간 직후에 벌어진 일이었다.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가족들은 공포스러웠다.

김수영은 종종 종삼('종로삼가'의 준말. 1950~1960년대 사창가로 유명했음.)과 같은 사창가를 공공연히 출입하기도 했다. 그래서 가족들은 김수영이 사창가에라도 가 피신해 있었으면 하고 바랐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행방불명 직후, 가족들은 그를 수소문하기 위해 그를 알 만한 곳은 모두 찾아보았다. 처가의 사돈네 팔촌까지 연락했다. 하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했다.

그런 시인은 일 주일 뒤 머리를 빡빡 민 채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그 일 주일간 소설가 김이석(1915~1964)의 집에서 숨어 지냈다. 그곳에서 김수영은 문밖으로 한 걸음도 얼씬하지 않았다. 담배가 떨어지면 김이석의 어린 아들에게 심부름을 시켜 사오게 해서 줄담배를 태웠다.

밤에 김이석이 들어오면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 김수영은 술 취한 목소리로 파리에 가겠다고 했다. 우리 문학에 '현대'가 없다는 이유로 파리에 가서 현대문학과 현대예술을 공부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김수영은 뜬금없이 이런 말을 내뱉었다.

"김형! 내가 의용군으로 나갔다가 반공포로로 석방돼 왔을 적에, 우리 어머니가 무어라 한지 알아요? 너도 사람을 죽였냐고 물었어요. 사람을 죽였냐고."
"……"
"김형! 내가 무어라 한지 알아요?……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어머니, 전쟁에서는 남을 죽이지 못하면, 내가 죽어요. 내가……." - 최하림, <김수영 평전>, 309쪽.


김이석의 집으로 피신한 김수영에게 5·16은 무의식적인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것은 그가 술에 취한 채 한국을 떠나겠다는 말하는 대목에서, 그리고 의용군과 반공포로의 기억을 읊조리는 대목에서 드러난다. 박정희가 내건 혁명 공약의 첫 번째 항은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로 시작되었다. 그의 머릿속에서 본능적으로 '빨갱이 콤플렉스'가 작동했을 것이다.

'신귀거래'라는 제목으로 약 석 달간 이어진 연작시 8편은 김수영의 그런 상황을 반영한다. 그즈음 김수영은 스스로를 자신만의 '방'에 가두었다. 그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은 채 보이지 않는 공포와 불안에 떨었다. 그 두려움은 수시로 찾아왔다. 평소와 달리 약 석 달간 아홉 편이나 되는 작품을 남긴 것도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공포와 불안이 극도에 달한 상황은 연작시의 마지막 작품인 <이놈이 무엇이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이 시에서 화자는 거의 '유령' 같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좀비' 같아 보이기도 한다. '정적'마저 필요하지 않다(14, 15행 참조). '시계도 없'(28행)다고 말하는 이 작품의 화자는 <누이야 장하고나!>에서 '해탈'이라고 외치는 화자의 모습과 정확히 일치한다. 거의 아무런 일도,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신귀거래'에서 그려지는 김수영의 모습은 안타깝다.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이 가져오는 고뇌와 번민 속에서도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군인이 총칼을 앞세워 권력을 찬탈했지만 그는, 그리고 대한민국은 그들을 속수무책으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 불과 1년 전에 나라에서 거대한 민중혁명이 들불처럼 일어났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으리라. '나 돌아가리라'를 외치며 불안과 공포, 절망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김수영이 처량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김수영 #'신귀거래' 연작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이놈이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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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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