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사회는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사회다"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62] <먼 곳에서부터> <아픈 몸이>

등록 2013.11.05 15:49수정 2013.11.05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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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부터

 

먼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다시 몸이 아프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조용한 봄으로
다시 내 몸이 아프다

 

여자에게서부터
여자에게로

 

능금꽃으로부터
능금꽃으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몸이 아프다

(1961. 9. 30)


아픈 몸이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골목을 돌아서
베레모는 썼지만
또 골목을 돌아서
신이 찢어지고
온 몸에서 피는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르는데
또 골목을 돌아서
추위에 온 몸이
돌같이 감각을 잃어도
또 골목을 돌아서 

 

아픔이
아프지 않을 때는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 

 

(이제부터는
즐거운 골목이
그 골목이
나를 돌리라
ㅡ 아니 돌다 말리라)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나의 발은 절망의 소리
저 말(馬)도 절망의 소리 

 

병원냄새에 휴식을 얻는
소년의 흰 볼처럼
교회여
이제는 나의 이 늙지도 젊지도 않은 몸에
해묵은
1961개의
곰팡내를 풍겨 넣라
오 썩어가는 탑
나의 연령
혹은
4294알의
구슬이라도 된다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온갖 적들과 함께
적들의 적들과 함께
무한한 연습과 함께
(1961)

 

 

오늘은 '아픔'에 관한 두 편의 시를 읽는다. <먼 곳에서부터>(이하 <먼 곳>)와 <아픈 몸이>(이하 <아픈 몸>)라는 제목의 작품들이다. 전자는 '아픔' 자체에 점령당한 일상의 고통을 노래한다. 후자에는 그 아픔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있다. 그런데 힘이 없다. 자조와 비애의 분위기가 훨씬 강하게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이 시의 표면에 그려진 적극적인 몸부림은 자조적인 반어일 뿐이다.


이들 작품에서 '아픔'은 절망과 좌절의 다른 이름이다. <먼 곳>의 아픔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5연 1행) 온 것이다. "조용한 봄에서부터 / 조용한 봄으로"(2연 1, 2행), "여자에게서부터 / 여자에게로"(3연) 온 것이다. 첫 두 연에서 반복되는 "다시 몸이 아프다"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그것은 과거 아픔의 되풀이기도 하다. 자신도 모르게, 시간의 영원한 흐름 속에서, 그 누구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지난날의 아픔을 다시 겪게 된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다.


<아픈 몸>에서 화자는 '무수한 골목'(2연 3행)에 갇혀 있다. 그곳에서는 "신이 찢어지고 / 온몸에서 피는 / 빠르지도 더디지도 않게 흐"(1연 6~8행)른다. "추위에 온몸이 / 돌같이 감각을 잃"(1연 10, 11행)어버리는 곳이기도 하다. 그 '골목'에서는 '나의 발'과 '말[馬]'도 모두 '절망'에 빠져 있다.


화자는 "아픔이 / 아프지 않을 때는 / 그 무수한 골목이 없어질 때"(2연)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무수한 골목'을 없애는 방법이 없다. 그저 "아픈 몸이 / 아프지 않을 때까지 가자"라는 청유형 문장만 있다. "온갖 식구와 온갖 친구와 / 온갖 적들과 함께 / 적들의 적들과 함께 / 무한한 연습과 함께"(5연 3~6행) 가자고만 한다. 가서 무엇을 하자는 말은 없다. '가자'라는 청유 표현이 반어적인 자조로 읽히는 이유다.


화자의, 시인 김수영의 이 극심한 무력감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두 시 모두 5.16 쿠데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시점에 쓰였다. 앞서 나온 <먼 곳>이 나온 게 1961년 9월 30일이다. <아픈 몸>은 정확한 날짜가 없으나 <먼 곳>이 나온 시점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때 쓰였을 것이다. 이들 작품의 절망과 좌절은 바로 이 군사 쿠데타에서 비롯되지 아닐까.


쿠데타 세력은 혁명 공약의 첫 번째를 '반공'으로 장식했다. 그것은 의용군과 반공포로 출신이었던 김수영에게 본능적인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김수영의 두려움은, '신귀거래 1~9' 연작시를 살피면서 소개한 것처럼, 5.16 직후 김이석의 집으로 피신한 사실을 통해서도 뒷받침된다.


박정희 쿠데타 세력은 입으로만 '반공'을 부르짖지 않았다. 1961년 7월 4일, 쿠데타 세력의 최고의사결정기구였던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장면 정부가 제정하려다 실패한 반공법을 전격적으로 제정, 공포한다. 반공법은, 그 한 달 전쯤에 탄생한 중앙정보부와, 1949년 제헌의회 때 이승만 정권이 만든 국가보안법 등과 더불어 극우반공체제를 공고히 하는 주요 수단이었다.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반공정책을 강화한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박정희의 형이자 김종필의 장인인 박상희는 1946년 대구 10.1사건 주동자의 한 사람으로 체포돼 사형을 당했다. 박정희 자신은 남조선로동당 군장교 프락치였다. 박정희는 1948년 여순 사건 이후 숙군 사업 과정에서 동료 공산당원 3백여 명을 밀고한 대가로 처형 위기에서 벗어났다. '공산주의자' 박정희로서는 세계 냉전 체제속에서 반공주의 정책을 중시한 미국의 의심을 해소할 필요가 있지 않았을까.


<민족일보> 조용수(1930~1961) 사장의 비극도 김수영에게는 예사롭게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조용수는 5.16 쿠데타 이틀 뒤에 연행되어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으로 구속되었다가, 그해 10월 31일 변호인 변론도 없이 상고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다가 약 두 달 뒤인 12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이 집행된다. 31세의 젊은 나이였다. 김수영에게는 언론인인 조용수 사장이 체포되는 과정이 결코 남의 일로만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수영은 1964년에 쓴 산문 <히프레스 문학론>에서 문학하는 사람들이 문학을 통해서 자유의 경간(徑間)을 넓히는 과제를 '대업'으로 규정할 만큼 사상과 양심, 표현의 자유 신장에 큰 목소리를 냈다. 같은 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백적인 구절을 남기기도 했다. 오늘 본 두 편의 시에 그려진 '아픔'도 이런 '고백'과 관련되지 않았을까.

 

나는 아직도 글을 쓸 때면 무슨 38선 같은 선이 눈앞을 알찐거린다. 이 선을 넘어서야만 순결을 이행할 것 같은 강박관념. 4.19 후에 8개월 동안 잠깐 누그러졌다가 다시 굳어진 강박관념. (중략) 결국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다는 귀결이 온다. 민주주의가 없는 나라에서는 작가의 책무가 이행될 수 없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이러한,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의 수수께끼를 되풀이하고 있다. 이러한 경우에 이북보다 이쪽이 '비교적' 자유가 있다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사회는 말대답을 할 수 있는 절대적인 권리가 있는 사회다. 그런데 이 지대에서는 아직까지도 이 '절대적인' 권리에 '조건'을 붙인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284, 285쪽.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2013.11.05 15:49 ⓒ 2013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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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에서부터> #<아픈 몸이> #5.16 쿠데타 #박정희 #민주주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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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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