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뎌진 김수영의 시, 지금이라고 다를까

[영원한 자유를 꿈꾼 불온시인 김수영 63] <시>

등록 2013.11.19 11:21수정 2013.11.19 11:21
0
원고료로 응원
어서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고
어서 일을 해요
미지근한 물이 고인 조그마한 논과
대숲 속의 초가집과
나무로 만든 장기와
게으르게 움직이는 물소와
(아니 물소는 호남 지방에서는 못 보았는데)
덜컥거리는 수레와

어서 또 일을 해요 변화는 끝났소
편지봉투모양으로 누렇게 결은
시간과 땅
수레를 털털거리게 하는 욕심의 돌
기름을 주라
어서 기름을 주라
털털거리는 수레에다는 기름을 주라
욕심은 끝났어
논도 얼어붙고
대숲 사이로 침입하는 무자비한 푸른 하늘


쉬었다 가든 거꾸로 가든 모로 가든
어서 또 가요 기름을 발랐으니 어서 또 가요
타마구(기자 주-아스팔트 도로포장에 사용되는 아스콘을 일컫는 말)를 발랐으니 어서 또 가요
미친놈 뽄으로 어서 또 가요 변화는 끝났어요
어서 또 가요
실 같은 바람 따라 어서 또 가요

더러운 일기는 찢어버려도
짜장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나이와 詩
배짱도 생겨가는 나이와 詩
정말 무서운 나이와 詩는
동그랗게 되어가는 나이와 詩
사전을 보면 쓰는 나이와 詩
사전이 詩 같은 나이의 詩
사전이 앞을 가는 변화의 詩
감기가 가도 감기가 가도
줄곧 앞을 가는 사전의 詩
詩.
(1961)

시인에게 시는 그의 전부다. '무엇'의 전부일까. 누군가에게는 '머리'가,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심장'일 게다. 수영에게는 '행동을 위한 밑받침'이었다. '온몸'이었다. 수영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행동까지의 운산(運算)이며 상승. 7할의 고민과 3할의 시의 총화가 행동이다. 한 편의 시가 완성될 때, 그때는 3할의 비약이 기적적으로 이루어질 때인 동시에 회의의 구름이 가시고 태양처럼 해답이 나오고 행동이 나온다. 시는 미지의 정확성이며 후퇴 없는 영광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430쪽)

수영에게 시는 '행동'이다. '정신'과 '감성'으로 끝나지 않는 것, 그의 머리와 가슴에만 머무르지 않고 '온몸'을 미는 것이다. 그것은 '아아, 행동에의 계시'(<김수영 전집 2 산문>, 433쪽)다.


그래서였을까. 수영은 시를 '찾으려고' 몸부림치지 않았다. 그는 시를 진득하게 '기다렸다.' '머리'나 '심장'이 아니라 '온몸'으로 하는 시를 쓰기 위해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다. 그 긴 기다림 끝에서 그는 극심한 산통을 겪듯이 시를 토해냈다. 뜨겁고, 너무나 뜨거워 차라리 차가운 시를.

행동을 위한 수영의 시는 날카로워야 했다. 모나고 삐딱해야 했다. 그에게는 시가 유일한 무기였다. 그것으로 세상에 '온몸'으로 부닥쳐야 했다. 날카로움과 모남과 삐딱함은 당연했다. 하지만 "변화는 끝났소"(1연 1행)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 때문이었을까. 시가 바뀌었다. "논도 얼어붙"(2연 9행)은 차가운 세상에서 그의 시는 변모했다.


알량한 재주를 싫어하던 수영과 수영의 시는 "짜장 재주를 부릴 줄 아는 나이와 시"(4연 2행)로 바뀌었다. '사전' 없이도 쓰이던 그의 '시'는 사전이 없으면 쓰일 수 없었다. 진득하게 기다려도 시는 그에게 오지 않았다.

수영의 시는 "사전이 詩 같은 나이의 詩 / 사전을 앞을 가는 변화의 詩"(4연 7, 8행)가 돼버렸다. 급기야 수영의 시는 결국 날카로움과 모남, 삐딱함도 잃어버렸다. 그는 고백한다. "정말 무서운 나이와 詩는 / 동그랗게 되어가는 나이와 시"(4연 4, 5행)라고.

무엇 때문이었을까. 수영과 수영의 시의 날카로움은 어떤 이유로 '동그랗게' 돼버렸을까. 박정희의 군사 쿠데타에서 그 원인을 찾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군부 권력 치하의 숨막히는 긴장과 공포. 이것은 훗날 그가 평론가 이어령과 주고받은 '참여시 논쟁'의 고갱이이기도 하다.

문학하는 사람들이 왜 이다지도 무기력하냐는 비난이 요즈음 자자한 것 같지만 책임은 결코 문학하는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 필자부터도 쓸데없이 몸을 다치기는 싫다. 정말 공산주의자라면 자기의 신념을 위해서 자업자득하는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도 않은데 섣불리 몸을 다칠 필요는 없다. 그렇지만 창작상에 있어서는 객관적으로 볼 때 그야말로 '불온사상'을 가진 것(같이) 보여지는 수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오해의 결과가 사직당국의 심판으로 '저촉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가지고 온다 하더라도 문제는 그 판결의 유죄·무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문제는 '만일'에의 고려가 끼치는 창작 과정상의 감정이나 꿈의 위축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축현상이 우리나라의 현사회에서는 혁명 후도 여전히 그 전이나 조금도 다름없이 계속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죄악이다. (<김수영 전집 2 산문> 179쪽)

<시>가 쓰인 시대로부터 반 세기가 훨씬 더 지났다. 우리는 "대숲 사이로 침입하는 무자비한 푸른 하늘"(2연 10행)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났을까. 이 시대 시인들은 "꿈의 위축현상"에 시달리지 않고 자기만의 날카롭고 모나고 삐딱한 시를 쓸 수 있게 되었을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으로 세운 민주주의가 뒷걸음질치고 있다. 일방적인 사상과 이념의 잣대가 횡행한다. 현역 국회의원이 내란 혐의로 체포되고, 그가 속한 정당은 정부로부터 해산 심판 청구 소송의 대상이 되었다. '종북'과 '진보'와 '전라도'가 불온자 명단의 맨 앞자리를 차지한 지 오래다. "감정이나 꿈의 위축"을 '죄악'으로 본 수영이 2013년의 대한민국을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시> #김수영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AD

AD

AD

인기기사

  1. 1 "연봉 천만원 올려도 일할 사람이 없어요", 산단의 그림자
  2. 2 은퇴 후 돈 걱정 없는 사람, 고작 이 정도입니다
  3. 3 구강성교 처벌하던 나라의 대반전
  4. 4 '판도라의 상자' 만지작거리는 교육부... 감당 가능한가
  5. 5 [단독] "문재인 전 대통령과 엮으려는 시도 있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