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시정연설 40분, 국민권리는 잠시 유보됐다

[取중眞담] 'VIP 경호' 이유로 전교조 기자회견 당일 연기... EI 대표단 출입도 막아

등록 2013.11.19 15:54수정 2013.11.19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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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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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 떠나는 박근혜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18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처음으로 가진 시정연설을 마친 뒤 여당 의원들의 수행을 받으며 국회 본청을 나서고 있다. ⓒ 이희훈


지난 18일 오전 10시 15분에 벌어진 일이다. 기자는 취재 일정이 있어 서울 영등포 국회 본청으로 향했다. 1층 안내실에 도착했다. 입구에 설치된 탐지기에 몸과 가방을 통과시켜 '안전함'을 확인받은 뒤, 안내데스크로 가 신분증을 내밀며 출입증을 달라고 요청했다.

안내데스크 직원은 "지금은 안 된다"고 잘라 말했다. 순간 당황했다. 취재 때문에 약 1년 반 동안 수십 차례 이곳에서 출입증을 받아왔지만 한 번도 거절당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입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물었다. 직원은 머리를 긁적이며 답했다.

"지금 대통령께서 시정연설을 하고 계셔서요. 연설 끝날 때까지는 외부인 출입이 안 됩니다."

기자는 이미 국회 전산에 '취재기자'라고 기록돼 있다. 간혹 몇몇 직원은 신분증만 받아 봐도 "<오마이뉴스> 기자시네요"라며 알아차리기도 했다. 이날 본청에 들어올 때 몸·가방 검사도 받아 수상한 물건을 소지하지 않았다는 것도 증명받았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면서 "취재하러 들어가야 한다"고 재차 요청했다. 그래도 직원은 "위에서 시키는 거라 우리도 어쩔 수 없다, 대통령 시정연설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대통령 시정연설 때문에... 출입 못한 EI 대표단

약 10분 후, 낯익은 사람들이 안내데스크 앞으로 모여들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아래 전교조) 지도부와 세계교원단체총연맹(아래 EI) 대표단이었다. 이들은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도종환 민주당 의원의 협조를 받아 오전 10시 30분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할 예정이었다. 기자가 이날 취재할 일정이기도 했다.

그러나 안내데스크에서는 예정된 기자회견을 하러 온 전교조 지도부와 EI 대표단의 출입마저 대통령이 시정연설 중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출입을 막았다. 이영주 전교조 수석부위원장 등이 기자회견 일정을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EI 수잔 홉굿 회장과 프레드 반 리우벤 사무총장 등은 로비에 가만히 서서 연설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알고 보니 기자회견 일정도 시정연설 때문에 10시 45분으로 연기된 상태였다. 하병수 전교조 대변인은 기자에게 "시간을 늦춰야 한다는 이야기를 오늘 아침 도종환 의원실에서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냥 기자회견일 뿐인데 굳이 일정을 연기하고 출입까지 막는 이유가 뭔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청 1층 안내실에 있던 박영석 국회 방호팀장은 기자에게 "사안에 따라 외부인 출입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출입을 막는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자, 인상을 찌푸리며 "사안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기자회견 진행이나 취재 등의 업무가 출입을 통제할 만한 사안이냐고 질문했다. 그는 "'VIP(Very Important Person)'인 대통령 경호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양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오전 10시 40분, 박 대통령 차가 국회를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안내데스크는 그제야 전교조와 EI 대표단, 그리고 기자에게 출입증을 건네줬다.

1층 기자회견 일정까지 연기하는 건 '과잉 경호'

도종환 의원실은 2주 전인 지난 4일께 EI 대표단의 정론관 기자회견을 예약했다. 박 대통령 시정연설 일정은 그보다 앞선 10월 31일에 정해졌다. 만약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하는 동안 기자회견을 진행할 수 없다면, 애초 그 시각에 기자회견 일정을 잡아서는 안 됐다. 그런데도 국회는 기자회견 당일에서야 갑자기 시각을 연기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국회사무처 관계자는 19일 <오마이뉴스>와 한 전화통화에서 기자회견 연기 이유를 이같이 해명했다.

"국회 시정연설 때문에 도종환 의원실 쪽 기자회견 예약을 받지 말라는 지시는 당시 없었다. 어제(18일) 아침 방호팀에서 기자회견 일정을 늦춰야한다는 연락이 왔다. 대통령 경호 등의 문제 때문인 걸로 알고 있다."

방호팀 관계자는 "청와대 경호실에서 엄격하게 신원이 확인되는 사람만 들여보내라고 경호요청을 했다"고 해명했다. 결국 당일 청와대의 경호 요청 때문에 2주 전에 예약된 EI 대표단 기자회견 시각이 연기됐고, 신원이 확인된 사람들의 출입마저 차단된 것이다. 

국가 원수인 대통령을 경호하는 일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대통령이 시정연설하는 국회 2층 본회의장과 이동경로에만 경호를 집중해도 충분했다. 대통령 면전에서 시위를 한다는 것도 아니고 1층 정론관에서 예정된 기자회견을 진행하는 자체를 가로막는 건 '과잉 경호'가 아닐까 싶다.   
  
대통령은 민의를 대변하는 기관인 국회에 온 손님이다. 입법부인 국회의 수장도, 제왕도 아니다. 대통령이 예산안 처리를 촉구하기 위해 국회 본회의장에 설 때, 일반 국민들도 사회문제 해결을 촉구하고자 국회 기자회견장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

영국 런던 상공의 비구름들이 박 대통령을 위해 햇빛에게 하늘길을 양보했다고 해서 대한민국 국민이 대통령 때문에 국회 이용 권리를 양보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시정연설을 한 지난 18일, 국민의 권리가 잠시 유보된 '40분' 동안의 시간은 참 씁쓸했다.
#박근혜 #전교조 #청와대 #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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