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회] 사부님이 부탁한 시만 읊었을 뿐인데...

[무협소설 무위도(無爲刀)][30회] 춘계문답 (2)

등록 2014.03.20 12:29수정 2014.03.2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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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장 춘계문답

a 무위도  無爲刀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혁련지의 체체염상을 중심으로 결성된 동서계(東西契)는 동정상인 중에서도 공격적인 경영으로 다른 상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즈음 류구는 왜와 거래가 활발했고 왜의 상인으로부터 은이 많이 유입되었다. 혁련지는 소금의 결제 수단이 점점 은으로 통일되는 시점에서 질 좋은 왜의 은이 필요했다. 은을 많이 확보하는 것은 좋은 소금을 선점하는 수단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류구에 비단과 면포, 도자기 등을 팔고 류구 상인이나 왜 상인으로부터 은으로 결제 받고자 했다. 바다 건너 무역에는 관(官)의 허가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상인들이 관행으로 거래를 해왔다.


혁련지가 속한 동서계는 이런 음성적 관행을 탈피해 공식적인 무역으로 전환하고자 관부에 해외거래 허가를 신청했다. 동서계와 경쟁 관계인 산서상인 출신의 태원계(兌元契) 역시 류구의 진출을 모색하고 있었다. 동서계가 관에 무역 허가를 신청하려 한다는 소식을 입수한태원계가 같이 신청하자고 했으나 동서계가 거절했다. 그러자 상단에 험한 소문이 돌았다. 태원계가 강호의 인물들을 불러모으니, 앞으로 동서계 객상의 소금 운반이 쉽지 않을 것이니, 하는 말이 들렸다. 혁련지는 객상의 안전을 위해 소주에서 가장 큰 표국인 용호표국에 호위를 의뢰하기도 했다. 이런 사정으로 보건데, 혁련지를 협박하기 위해 태원계에서 사주한 무뢰배들의 장난이 틀림없었다. 

집안을 대충 수습하고 혁련지가 차를 한 잔 내오자, 위약청은 당장 도관(道館)에 가보야 한다고 일어섰다.

"언제 또 저놈들이 나타나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 당분간 내가 이 저택에 거(居)해야겠소이다. 현관의 곁방에 머물러도 괜찮겠지요, 소저?"

위약청이 혁련지를 바라보며 제멋대로 얘기했다.

혁련지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묵묵부답으로 있자,


"내 도관에 가서 짐을 챙겨 오리라."

잽싸게 일어나며 말했다.


"그러실 것 없어요. 저도 무예를 익힌 몸. 웬만한 강호인쯤은 감당할 수 있어요. 게다가 남의 집 살림이나 부수는 무뢰배 정도는 저 혼자로도 충분해요."

혁련지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오, 소저. 태원계 놈들이 처음엔 이 정도로 경고했다가, 나중엔 무예를 갖춘 강호인들을 데려올지도 모르오."

위약청은 혁련지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하며 제 할 말만 하며 나갔다.

관조운이 비로소 위약청의 정체를 물었다.

"근처에 있는 용화관은 화산파에서 세운 도관인데 거기에 머물고 있는 무인이애요. 강호를 주유하면서 화산파 도관이 있으면 몇 달씩 머무는데, 제가 용화관에 시주를 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처음엔 내가 무술을 연마한 강호인이라는 것도 모르고 여자 혼자 지내는 게 위험하다며 보표를 자청했어요. 저야 뭐 굳이 마다할 이유도 없고……, 약간 귀찮게 구는 건 있지만 그건 내가 상관(商館)에 가버리면 그만이죠."
"호오, 보표를 자청한 화산파 무사라……, 혼자 사는 처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서는 건 예사 성의가 아닌데?"

관조운이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아요. 저 혼자 좋아서 하는 짓이니 말려도 소용없어요. 게다가 이런 사건까지 벌어졌으니 오죽 신나겠어요. 모르긴 몰라도 이제 하루 종일 제 신변을 호위하겠다고 난리일 걸요. 관 공자까지 제 옆에 있으니 더 신경 쓰이겠죠."
"좋겠구려, 혁련 소저."
"그만 빈정거리고, 이제 사형 얘기나 자세하게 들려주세요. 사부님은 어떻게 변고를 당하신 거예요?"

관조운이 어디서부터 얘기를 꺼내야 하나 하고 목청을 가다듬고 있는데,

"이제 소저니, 공자니, 서로 불편한 호칭은 삼가고 예전의 사형, 사매로 돌아가요."

하며 혁련지가 세월 속에서 떨어졌던 거리감을 없애 주었다.

관조운 역시 내심 바라던 바다.

"좋아, 혁련 사매."

관조운은 스승님의 최후와 자신이 쫓기게 된 사연을 들려주었다. 얘기를 들은 혁련지는 눈시울이 촉촉이 젖더니 이내 수정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흘렀다.

"사부님이 그렇게 돌아가시다니……. 항상 저에게 말씀하시길, 당신은 많은 강호인처럼 칼에 쓰러지거나 객사하기 싫어 은퇴를 하신 거라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은거한 거라고 하셨는데……."

혁련지는 품속에서 비단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꾹꾹 눌렀다.

"저를 손녀같이 귀여워 해주시고, 무림 얘기도 많이 해주셨는데. 저는 사부님께 무림의 영웅호걸과 세간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해달라고 밤마다 졸랐죠. 사부님은 조금도 싫은 내색을 하지 않고 저한테 많은 얘기를 들려 주셨어요."

말을 하다보니 감정이 조금씩 가라앉는지 그녀의 어조가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다.

"그나저나 사부님을 피습한 괴한에 대해선 아는 게 없나요?"

혁련지가 감정을 수습한 듯 눈에 힘이 들어가며 관조운에게 물었다.

"모르겠어. 그 자에 대해 알아보기 이전에 나는 지난 이틀 동안 정신이 없었으니까."
"혹시 사형께서 은화사 은가에 갇혔을 때 사형을 빼내준 사람이 혹시 그자는 아닐까요?"

"그것도 역시 모르겠군. 그 사람은 나한테 일언반구도 없었으니까. 근데 사부님을 습격한 자가 제자인 나는 구해준다. 이건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아니죠, 괴한은 어쩌면 사형이 필요했는지도 몰라요."
"왜 그렇게 생각하지?"

"사부님이 임종하시는 마지막 순간에 사형이 있었기 때문이죠. 괴한은 사부님께 무극진경의 향방을 물었고, 그 요결을 말하라고 하면서 악독한 방외술까지 썼어요. 그런데 비영문 집사가 오면서 일이 틀어지자 다음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 거예요. 괴한은 사부님의 무공이 쇠한 것을 모르고 왕년의 일운상인으로만 생각했는데, 사부님이 덜컥 돌아가시자 난감하게 됐을 겁니다. 거기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 사부님을 비영문으로 옮기자마자 무림맹 사람이 오고, 곧 이어 은화사 단원이 들이닥치고, 그 와중에 사형을 연행해가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괴한은 아마 사형에게 무슨 비밀이 있다고 생각했겠죠. 그래서 일단 사형을 그곳에서 빼낸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나는 사부님으로부터 특별히 언질 받은 것이 없는데, 그저 임종 직전에 사부님이 부탁한 시만 읊었을 뿐인데……."
"혹시 그 시에 무슨 특별한 의미가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요. 설마 사부님이 임종의 순간에, 그것도 괴한으로부터 무극진경의 출처를 대라는 핍박을 받아 육체적 고통이 가시지 않는 상태에서 시를 들려달라는 게 어찌 보면 한가하고 엉뚱할 것 같지만 한편으론 무슨 깊은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요."

관조운과 혁련지는 잠시 침묵에 잠겼다.
덧붙이는 글 다음주부터 월, 목으로 연재 간격을 조정하겠습니다

빠른 시일 내에 주3회 연재로 돌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위도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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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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