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방공사 십장의 청혼... 소선의 가슴에 파문이 일다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⑬] 2. 식민지의 딸

등록 2014.05.19 10:55수정 2014.06.1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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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길 ⓒ 홍황기


"소선아!"
"작은선아!"


먼 곳에서 아까부터 어렴풋이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이제는 산울림이 천파만파로 퍼지도록 큰소리가 났다.

'도망 쳐야 하나 죽은 듯이 엎드려 있어야 하나, 여기서 도망치면 어디로 도망친단 말인가! 저 소리는 저승사자의 소리란 말인가! 내 이름을 이런 대낮에 저렇게 크게 부른다는 것은 이미 내가 여기에 숨어 있다는 것을 순사들이 알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소선은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이제 잡혀서 맞아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온몸을 짓눌렀다.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옛날 자신한테 글을 가르쳐주던 전문학교 다니는 그 오빠도 보고 싶었다. 뿐만 아니다. 그가 살던 집, 구석구석 동네 골목들, 정들었던 것들 하나하나가 뇌리를 스치면서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곁에 아무 것도 없다. 이런 것이 외로움인가!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소선을 부르는 목소리는 어머니와 올케의 목소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일본놈들 순사가 찾아내라고 하도 볶아대니까 내가 있는 곳을 가르쳐준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했다.

"소선아,소선아,너 이제 고개 들고 콩잎 따도 된다."


분명 어머니 목소리다.

'내가 시집가라고 해도 안 가고,고모 집으로 돌아가라고 해도 고집 피우고 안 가니까 미워서 일러주어 버린 것은 아닌가?'


또 이런 의심이 들기도 했다.

"애기씨,애기씨,해방이 됐대요. 해방이!"

이번에는 올케 목소리다.

'해방? 해방이라는 것이 뭔가?'

소선은 꼼짝도 않고 '해방'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어머니와 올케는 바로 소선 가까이로 왔다.

"애기씨,일본 사람들이 물러간대요.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대요."
"소선아,이제는 여기에서 숨어 있지 않아도 된다. 집에 가서 살아도 된다."

어머니는 소선을 붙잡고 펑펑 우신다. 소선도 어찌된 영문인지는 잘 모르나 집에 가도 된다는 말에 그저 한없이 좋아서 어머니를 붙잡고 울었다. 그동안 집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어머니한테 꼬집혔지, 집에 있으면 안 된다고 고모한테 꼬집혀서 온몸이 멍들었다. 사방이 자신을 죽인다고 옭죄었는데 이제 그것에서 풀린다니 얼마나 좋은가! 해방이라는 뜻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소선은 이제 마음대로 집에서 살 수 있다. 해방이라는 것은 이런 것인가. 소선은 이렇게 집으로 돌아왔다.

"소선아, 이제는 집에 가서 살아도 된다"

그러나 해방이 되어 좋아서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해방이 또 다른 슬픔을 안겨준 사람들도 많다. 징용에 끌려간 사람들,정신대로 잡혀간 사람들이 있는 식구들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눈이 빠지도록 기다렸다. 하루가 지나고 한 달이 지나고 세월이 더 흘러도 돌아오지 않는 부모형제를 둔 가족들의 슬픔은 오죽하랴. 어떤 이는 죽었다는 통보와 함께 손톱이나 머리카락만 돌아와서 그 집안 식구들은 통곡으로 나날을 보냈다.

소선과 함께 정신대에 잡혀갔던 그의 친구들 6명 중에 살아서 돌아온 사람은 소선과 시남이 둘뿐이다. 그것도 시남이는 일하다가 실수해서 손가락이 잘린 상태로 돌아왔다.

해방이라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살기가 더욱 비참해져갔다. 반면 일본놈들이 있을 때 일본놈들과 친하게 지냈거나 그들 밑에서 일을 많이 한 사람들은 일본놈들이 놓고 간 재산을 차지해 잘살게 되었다. 또 일본놈들이 있을 때 그 지긋지긋하던 공출이 일본놈들이 물러가서 없어질 줄 알았는데 일본놈들 대신 미국놈들이 쌀을 공출하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대구에서는 사람들이 경찰서에 몰려가 데모를 하고 경찰들은 데모대들한테 총을 쏴 사람들이 여럿 죽었다는 소문이 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나 소선의 동네에서 전문학교도 다니고 똑똑하다는 청년 몇몇이 객지에 나가서 죽기도 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수 없기도 하다는 말도 떠돌았다. 나중에는 그 사람들이 좌익을 해시 그랬다는 비밀스러운 말들이 오갔다. 소선은 좌익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궁금하기도 했다.

어른들의 세상은 무엇 때문인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몹시 시끄러웠다. 어른들 세상의 시끄러움과는 달리 이팔청춘 처녀의 세상은 풋풋했다.

여름날이었다. 소선은 아침나절 내내 들일을 하다가 한낮에 점심을 먹고 더위를 잠시 식히기 위해 어머니와 집에서 잠시 쉬고 있었다.

"계십니까?"

대문 밖에서 사람을 찾는 남자 소리였다. 그러나 남녀가 유별하여 내외를 해야 하는지라 여자들만 있는 집이라서 어느 누가 낼름 대답을 할 수 있는 처지가 못됐다.

"계십니까? 목이 하도 마려워서 물 한 바가지 얻어 마시려고 왔습니다."

여러 번을 불러도 도대체 내다보는 사람이 없다. 하도 답답해서 소선이 그냥 대문 밖을 빼꼼히 내다보았다. 내다보니 웬 멀쩡한 총각이 어디서 흙일을 하다가 온 모양이다.

"무슨 일 때문에 부르시오?"
"예, 나는 저기 사방공사 십장인데 목이 하도 마려워 물 한 바가지만 얻어먹으려고 왔소."

소선은 아무리 내외도 중요하지만 지금 사람이 목이 타 저렇게 물을 찾는데 외면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용기를 내서 두레박을 가지고 나와 샘물을 한 두레박 떠서 그 총각한테 건네주었다. 그 총각은 물을 벌컥벌컥 달게 들이 마시고는 소선한테 고맙다는 말음 연거푸 했다. 가까이에서 보니 훤칠하고 서글서글하게 생긴 남자가 대처 물도 조금은 먹은 것 같았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그 남자는 이웃동네에 사는 사람으로서 학교도 중학교까지 나왔다고 한다.

그날 그 일이 인연이 되어 그 남자는 소선을 좋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어쩌다가 마주치면 따사로운 눈빛과 친절한 말을 잠깐씩 건네곤 했다. 소선 역시 그 사람이 믿음직스럽다는 생각을 했다.

사방공사 십장의 청혼... 파문이 가슴에 일렁였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 집에서 중신애비를 넣어 소선의 집에 청혼을 했다. 그 남자가 소선한테 청혼을 한 사실을 알게 된 소선은 부끄럽기도 했지만 가슴이 떨린다고 할까, 설렌다고 할까, 하여튼 알 수 없는 파문이 가슴에 일렁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소선의 집안에서는 그 집안의 청혼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이유는 그 집안은 양반의 집안이 아니고 상놈의 집안이기 때문에 양반 집안과 상놈 집안이 혼인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소선으로서는 옳지 않은 처사라고 생각했다. 너무 속상했다. 그래서 어머니한테 그 남자하고 혼인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야단만 쳤다.

사방공사장 십장하고 결혼을 못하게 해서 속상해 있는 터에 시집을 보낸다는 얘기가 나왔다. 소선은 무조건 시집을 안 가겠다고 말했다.

정씨로 해서 작은오빠가 있었다. 그 오빠가 결혼을 해 대구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 오빠의 부인이 중매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소선의 어머니하고 작은올케는 어쨌든 시부모가 있는 집으로 시집을 보내야 한다면서 대구에 괜찮은 집안의 총각 얘기를 꺼냈다. 시부모도 계시고 형제간도 많을 뿐더러 그 총각은 옷 만드는 기술이 좋으니 그 총각한테 중매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면 한번 보지."

소선의 어머니가 선뜻 나섰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어떻게든지 빨리 시집을 보내버리겠다는 생각이다. 전에 얘기가 나왔던 그 총각도 있기 때문에 하루라도 빨리 치워야 마음이 놓일 것 같으니까 그랬을 것이다.

꽃 피고 새 우는 어느 춘삼월. 그날도 소선은 밭일을 가기 전에 소죽을 끓여서 여물통에 풀고 있었다.

"오늘은 밭일 하러 나가지 맡고 방에 들어가서 바느질이나 하고 있어라."

어머니가 소선을 붙들었다. 소선은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집에 있었다. 얼마쯤 있으니까 처음 보는 할머니와 젊은 여자와 소선의 올케 그렇게 셋이서 소선의 집으로 들어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젊은 여자는 총각의 이종사촌동생으로서 소선의 올케와 잘 알고 지내는 사이라서 중매를 한 사람이고, 할머니는 총각의 어머니였다. 소선이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는데 손님으로 온 할머니가 소선이 일하는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았다.

"처녀, 이 방으로 온나. 나 물 한 그릇만 떠다주게."

소선은 건넌방으로 물 한 그릇을 떠가지고 갔다. 그때서야 선을 보러 왔구나 하는 것을 짐작했다.

물을 떠다달라고 한 것은 이런 까닭이었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며느리가 될 처녀를 선보았는데 방에 앉아서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 너무도 얌전해서 며느리로 맞아 들였다. 그런데 그 처녀는 다리가 불구였다. 그런 일 때문에 처녀를 선보러 갈 때 일부러 걷는 모습을 시험해보는 것이다. 그 할머니는 소선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참 귀가 복이 있게 생겼어. 말년에는 좋게 생겼어."

그 사람들은 많은 얘기를 나누고 점심 대접까지 받고 갔다. 그리고 며칠 있다가 회색 두루마기를 곱게 입고 고급 구두를 신은 부잣집 할아버지가 한 번 더 다녀갔다. 그리고 얼마 있다가 사성을 보내왔다.
#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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