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같이 죽자"... 바리케이드친 청계노조 사람들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36]4. 너의 분신, 우리들의 터전

등록 2014.08.05 11:35수정 2014.08.05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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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사용주들과 정부당국은 노동자들의 노조가입을 방해하기 위해 다양한 악선전을 다 퍼뜨렸다.


'너희들이 노조에 가입하면 첫째, 조합비를 내야 된다. 그러면 갑근세까지 내야 되니 너희들 손해다.', '노조에 가입하면 세금 물고 너도나도 다 죽는다.'

그들은 엉뚱한 이유를 들어 노동자들을 방해하고 또 노조 가입하면 해고를 시켜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업주들의 협박은 집요했다. 그 결과 조합원 숫자는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따라서 조합 재정도 바닥이 났다. 간부들은 매일같이 굶주림 속에서 사업장을 방문하여 조합 가입을 권유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그래도 길이 있겠지. 끝까지 버텨야지. 제 몸을 불살라 죽은 태일이가 오죽했으면 죽음이라는 방법을 선택했겠는가.'

이소선이나 전태일의 친구들은 죽은 전태일을 생각해서 고통 속에서도 모두가 한마음으로 참고 견디었다.

12월 21일, 노동자들의 노조가입을 권유하기 위해서 현수막을 크게 만들어서 평화시장 입구에 높이 달았다.


'노동조건 개선 위해 노동조합 가입하자.'
'분신으로 쌓은 터전 단결하여 주권 찾자.'

이 글씨는 눈에 잘 띄도록 빨간색과 파란색으로 큼지막하게 썼다.


그날 밤이었다. 경찰관 몇 명이 노조사무실에 찾아왔다. 현수막 무단설치는 광고물 단속법 위반이므로 뜯어내라는 것이다. 노조 간부들은 노조활동이기 때문에 철거할 수 없다고 버티었다.

"저렇게 빨간 글씨로 근로자들을 선동하는 플래카드를 거는 것은 이북 놈들이나 하는 짓으로 완전히 불법이다. 빨갱이 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노동조합을 할 수 없으니 콩밥을 먹을 줄 알아!"

경찰들은 위압적으로 현수막 철거를 요구했다.

"이 밤에 뜯을 수는 없으니 뜯더라도 내일 낮에 뜯겠소."

노조 간부들이 이렇게 말하고, 정당한 노조 활동을 방해하는 것에 항의했다. 그러나 경찰들은 조합 간부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철거하라는 말만 되풀이한다.

"그래 좋다. 이 더러운 놈들아! 내가 당장 뜯겠다. 우리가 죽어줄 테니, 어디 너희 놈들끼리 잘 살아봐라!"

"현수막 하나 못 달게 하는 노조 해서 뭐해"

이소선은 열불이 나서 분노를 폭발 시켰다. 그리고 그 밤중에 전신주에 올라가서 단숨에 현수막을 뜯어 버렸다.

"에이 씨팔, 다 죽어버리자! 현수막 하나 못 달게 하는 노조 해서 무엇해!"

사무실에 있던 간부 10여 명이 화를 참지 못하고 노조결성 축하로 답지한 수많은 화분, 서류철 등 사무실 집기를 닥치는 대로 내던졌다. 삽시간에 사무실 안은 아수라장으로 돌변했다. 최종인은 얼굴빛이 시퍼래져서 경찰 놈의 새끼들 다 죽인다고 설쳐댔다. 간부들이 의자며 화분들을 사무실 계단이며 창 밖에 내던지고 경찰들과 싸움을 벌였다. 이소선은 전신주에서 내려와 걷어낸 현수막을 들고 경찰의 모가지에 감았다.

그리고 그 현수막을 잡고 나뒹굴었다. 그러니 현수막으로 있는 힘을 다해 경찰의 목이 졸라졌다. 그 경찰은 이소선의 손목을 잡고 이소선을 힘껏 떠밀었다. 이소선이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경찰의 잠바와 이소선의 옷에는 채 마르지 않은 페인트가 덕지덕지 엉겨 붙어 있었다. 사무실은 엉망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한바탕 싸움 끝에 경찰이 물러갔다. 경찰이 물러간 뒤 한밤중에 회의를 열었다.

"현수막도 못 걸게 하고, 콩밥 먹이겠다고 하는데, 형무소 가는 것도 무섭지 않다. 이렇게 당하고만 있으면 태일이하고 한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바에 우리가 여태껏 헛발질을 했으니 차라리 다 죽어 버리자!"

회의는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는 분위기다. 저마다 분을 삭이지 못하고 감정이 폭발했다. 씨근덕거리며 누군가 말을 토해내자 여기저기서 그 길밖에 없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모두가 똑같은 심정이었다.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사람이 부리나케 밖으로 나가더니 석유 두말을 사가지고 왔다.

"자, 석유 사왔으니 우리도 태일이처럼 분신을 하든지, 여기서 전부 다 창밖으로 불을 붙이고 뛰어 내리든지 합시다!"

석유통을 열고 곧장 기름을 끼얹을 듯이 분위기가 살벌했다. 누가 나서서 말린다 해도 전혀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이때 누가 한마디 했다.

"잠깐만, 우리가 매일 굶다시피 하다가 이제 죽기로 했으니 기왕에 죽는 것 먹는 것이나 한번 실컷 배 터지게 먹어보고 죽읍시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고 했으니."

이들은 늘 고픈 배를 안고 살아와서 그것이 한이 맺혀 있었나 보다. 죽음을 각오한 그 순간에 오죽했으면 먹을 것을 찾았을까. 또 한 사람이 우당탕 거리며 갈비탕을 시키러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그때 마침 서울대 대학원생인 이영희가 사무실에 와 있었다. 이영희는 전태일 사건이 터지자 평화시장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들러서 간부들을 격려해 주었다. 이런 난리가 터졌으니 그냥 갈 수도 없고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이소선은 하도 답답해서 이영희에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어머니, 이렇게 죽으면 어떻게 합니까. 태일이의 죽음은 어떻게 하고요? 아무리 어려워도 살아 있어야지 태일이 뜻을 이룰 수가 있지요. 이렇게 죽는다면 뭐 할라고 노조를 만들었습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서 열심히 해야지요."

노조간부들은 이영희의 말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모두가 살기등등해서 눈빛만 붉으죽죽한 형편이었다.

이들은 화분과 사무실 집기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12명이 모두 집단 분신을 하기로 결정하고 온몸에 석유를 끼얹었다. 몇몇 간부들은 '허수아비 근로기준법'이라고 혈서를 써서 벽에 붙였다. 간부들은 그 경황 가운데서도 전태일을 추도하는 의식을 갖기로 했다. 이들이 추도식을 하고 있는데 기동경찰이 들이닥쳐 바리케이드를 뛰어넘어 들어왔다. 경찰들은 분신을 중지할 것을 요구해왔다.

"야, 이 개자식들아! 물러가! 물러가지 않으면 불을 싸질러 버릴 테다!"

간부들은 라이터를 꺼내들고 위협했다. 경찰들은 간부들이 석유를 끼얹고 있는 것을 보고 순순히 물러섰다.

이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연좌농성을 시작했다.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밤 11시 반쯤 갑자기 유리창이 사방에서 깨졌다. 소방호스가 사무실 안으로 들이닥치더니 거센 물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간부들은 물줄기에 얼굴을 맞고 퍽퍽 쓰러져 나갔다. 마스크를 쓰고 군복을 입은 경찰 기동대들이 군홧발을 앞세워 침입하더니 이소선의 팔을 꺾었다. 나머지 간부들도 물과 기름이 범벅이 된 처참한 몰골로 순식간에 잡혔다. 모두들 배가 고파 기진맥진한 상태니 제대로 저항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싸움 한번 해보지 못하고 몽땅 체포됐다. 경찰은 이들을 트럭에 집어 던졌다. 까만 천막이 드리워진 경찰 트럭에 실린 이들은 어두워서 서로의 얼굴조차 바라볼 수가 없었다. 간간이 신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12월 한 겨울, 물에 흠뻑 젖은 이들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보다도 더 차가운 현실에 몸을 떨고 있었다.
#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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