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가 사망한 장소인 덕수궁의 내부 모습. 서울시 중구 정동 소재.
김종성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정권은 광해군과 이이첨·김개시가 선조를 독살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가졌다. 그래서 진상 규명에 착수했지만, 끝내 의혹을 밝히지 못했다. 당시의 광해군 세력은 완전히 파멸된 상태였다. 그래서 인조 정권이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것을 부정할 세력이 없었다. 그런데도 인조 정권은 광해군·이이첨·김개시의 독살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다.
인조 정권이 찾아낸 것은 광해군 측이 사망 당일 선조에게 약밥을 주었다는 사실 정도였다. 이 점은 인조가 죽은 뒤에 기록된 인조 1년 9월 14일자(1623년 10월 7일자) <인조실록>에 기록되었다. 여기서는, 김개시가 선조에게 올린 약밥에 독약을 넣었다는 말이 있다고 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이 있다. 인조 1년 9월 14일자 <인조실록>에서 독살 의혹을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는 점이다. '독약을 넣었다는 말이 있다'는 정도로 끝맺은 것이다. 이것은 인조 정권이 독살 혐의에 확신을 갖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간과할 수 없는 또 다른 사실이 있다. 위의 <인조실록>은 본문과 논평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에는 역사적 사실이 기록되어 있고, 논평에는 해당 사실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의견이 실려 있다. '김개시가 올린 약밥에 독약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말은 논평에 실려 있다.
독살 의혹을 사관의 의견 형식을 빌려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나마 그런 의혹을 실록 본문에 싣는 것에 대해서조차도 합의가 형성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관이 개인적인 논평을 다는 것에 그친 것이다.
독살 혐의를 밝히려는 노력이 끝내 실패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기록으로 조선 후기 학자인 박세채(1631~1695년)의 문집인 <남계집>이 있다. 이 문집에는 선조의 시신을 눈으로 확인했다는 성협이라는 의원의 이야기가 나온다. 선조가 죽은 뒤에 시신을 확인한 성협은 "임금의 몸이 검푸르고 이상하다"며 "바깥에서 하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다"란 말을 남겼다.
시신이 검푸르다고 하여 곧바로 독살을 단정할 수는 없다. 심혈관계 환자들 중에는 혈색이 검푸른 이들이 있다. 그런데도 성협이 독살을 기정사실화하는 듯한 말을 한 것은, 그가 이미 독살설을 확신한 상태에서 시신을 확인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바깥에서 하는 말이 헛소문이 아니다'라는 말은 그가 독살설에 대한 믿음을 가진 상태에서 시신을 보러 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광해군이 실각한 뒤에 성협의 말을 근거로 광해군 규탄 상소를 준비한 인물이 원두표라는 사람이었다. 원두표는 광해군을 실각시키는 데 참여한 공로로 공신이 되고 훗날 장관급을 거쳐 좌의정에까지 올랐다.
선조 독살설을 담은 상소를 준비하던 원두표는 얼마 안 있어 스스로 꼬리를 내리고 말았다. <남계집>에 따르면, 박세채가 "그때 왜 상소를 포기했나?"라고 묻자, 원두표는 "세세한 사실까지 다 들추어봤지만, 약밥에 독이 들었다는 증거는 없었다"면서 "경솔히 다룰 수 없었다"고 대답했다. 이것은 인조 정권이 광해군의 선조 독살을 밝히려고 백방으로 노력해봤지만 모두 다 허사였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조 독살설, 기정사실화 하지 못한 인조 정권만약 선조가 독살됐다는 증거가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인조 정권은 그것을 어떻게든 기정사실로 확정했을 것이다. 인조 정권의 주장을 반박할 세력이 쿠데타로 전복됐기 때문에, 약간의 증거만 있었더라도 얼마든지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조 정권은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