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시대의 주요 궁궐인 경운궁(덕수궁)의 내부 모습.
김종성
광해군 아닌 광해군 '정권'에 충성한 이이첨이이첨은 충성스러운 신하였다. 그가 역모 사건을 일으킨 것은 과잉충성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바친 충성의 의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는 '광해군'이 아니라 광해군 '정권'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다.
이이첨이 광해군 정권이 영원하기를 바랐을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적을 듯하다. 이이첨처럼 광해군 정권을 지키기 위해 온갖 머리를 다 쓴 사람은 드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해군 정권에 대한 그의 충성심은 의심하지 않아도 무방할 듯하다.
그런데 이이첨은 광해군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해서는 절대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그는 광해군이 추진하는 주요 개혁에 대해 번번이 제동을 걸었다.
텔레비전 사극에는 일반 백성들이 포졸에게 호패를 제시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제도가 실제로 시행된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세워진 뒤부터 광해군 정권이 출범하기까지의 216년 동안에 호패 제도가 시행된 기간은 14년간밖에 안 됐다.
16세 이상의 백성에게 호패 착용을 의무화하고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신상을 파악하는 것은 왕권을 강화 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것은 백성 개개인에 대한 왕의 장악력이 높아지고 중앙정부의 조세 징수 능력이 높아지는 것을 의미했다. 1610년에 광해군이 호패제도를 추진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호패제도를 싫어했다. 왕권이 강해지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이이첨도 그런 귀족이었다. 그는 임진왜란 때 모집한 의병들을 사병으로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사병들이 중앙정부에 의해 파악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호패제도를 반대했다. 광해군의 호패제도는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하고 2년 만인 1612년에 좌절되고 만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실리외교 혹은 중립외교도 반대했다. 1616년에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규합해서 후금을 건국하자, 1618년에 명나라는 '악의 축'을 토벌하자면서 조선에 파병을 요청했다. 광해군이 이 요청을 얼른 수락하지 않자, 광해군 윤4월 24일자(1618년 6월 16일자) <광해군일기>에 따르면 이이첨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킬 것을 촉구하며 광해군을 압박했다.
최측근인 이이첨마저 실리외교를 반대했기 때문에 광해군은 이를 비밀리에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수락하되 전투 도중에 후금(청나라)에 항복한다'는 비밀 계획을 세운 뒤 이것을 파견군 사령관인 강홍립에게 은밀히 지시했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개혁정책인 대동법에 대해서도 모호한 입장을 나타냈다.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는 어중간한 태도를 취한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불만을 표출한 것은, 대동법 시행이 서민층에게는 유리하고 특권층에게는 불리한 세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개혁 의지 없이 군주의 참모가 된 이이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