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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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출신에 대한 인사차별이 심했다는 점은 이번 참모열전의 주인공인 채제공의 글에서도 잘 나타난다.
채제공은 영조 집권 후반기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정조와 함께 개혁정치를 수행한 영·정조 시대의 핵심 참모다.
채제공은 충청도 홍주 사람이었지만 그 역시 경상도의 처지에 관심이 컸다. 그의 문집인 <번암집>에 실린 '만와집서'란 글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당론이 갈라진 이래로, 조정에서는 자기편이 아니면 제 아무리 관중과 제갈공명의 재주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모두 초야에 버렸다. 이것이 영남에서는 더욱 더 심했다."관중이나 제갈공명같은 인재일지라도 경상도 출신이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18세기의 경상도 사람들이 받은 차별을 비판하는 글이다.
여기서 말하는 경상도 사람들은 경상도 지식인이나 상류층을 가리킨다. 평생을 살아도 자기 고향을 벗어나기 힘들었던 일반 서민들의 처지에서는, 저 멀리 한양의 중앙정부는 머나먼 별세계 같은 존재였다. 중앙정부의 차별에 대해 불만과 문제의식을 품은 것은 주로 경상도 지식인과 상류층이었다.
19세기 초반에 경상도에 본관을 둔 안동 김씨 가문이 한동안 정권을 장악했지만, 경상도 사람들의 가슴에 새겨진 불만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이 점은 1881년에 1만여 명의 경상도 선비들이 '영남 만인소'라는 집단 상소를 올린 데서도 잘 드러난다.
당시 이들은 고종 이명복 주상의 시장개방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다른 계층도 아닌 선비 집단이 대규모로 군주에게 대든 것은, 그만큼 경상도 선비들의 가슴에 쌓인 불만이 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렇게 18세기 초반 이후로 경상도가 차별을 받게 된 직접적 계기는 숙종시대(1674~1720년)의 정치 상황에서 찾을 수 있다. 숙종시대에는 비교적 진보적인 남인당(동인당의 분파)과 비교적 보수적인 서인당의 정쟁이 격렬했다. 그러다가 1694년 갑술환국(갑술년의 급진적 정계개편), 남인당은 서인당과의 한판 승부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구한 말, 황현이 정치 평론서인 <매천야록>에서 언급했듯이 남인당은 갑술환국 이후로 정계에서 사실상 밀려났다. 이때 남인당과 함께 몰락한 인물이 바로 장희빈이다. 장희빈은 남인당의 지원을 받아 중전이 됐다가 남인당과 함께 몰락했다. 이때 몰락한 남인당의 중추세력 중 하나가 바로 경상도 출신들이었다.
갑술환국으로부터 34년이 지난 1728년, 이때는 숙종과 경종에 이어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 뒤였다. 이 해에 이인좌의 난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반란군 주역인 소론 준론 즉 소론당 강경파는 "영조가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하고 왕이 됐다"는 소문을 근거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때 소론당 강경파와 함께 반란에 참여한 집단 역시 남인당 출신이었다.
만약 반란군이 승리했다면, 남인당과 함께 그 중추세력인 경상도도 살아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군사반란은 '성공한 쿠데타'가 되지 못했다. 이로 인해 남인당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고 경상도의 위상은 한층 더 위축됐다. 무관 노상추가 '신문'을 볼 때마다 TK에 대한 대우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바로 이런 배경 때문이다.
왕권 강화 위해 조력한 채제공, 그의 무기는 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