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더 부르스베녹번 헤리티지 센터에 있는 로버트 더 부르스의 동상. 스코틀랜드에서 쓰이는 20파운드 지폐에도 그의 초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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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14년 6월, 마침내 스코틀랜드 군과 잉글랜드 군 사이에 대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장소는 베녹번 성. 스코틀랜드에서 잉글랜드 군을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베녹번을 함락시켜야 했죠. 하지만 성을 장악하고 있는 잉글랜드 군도 결코 호락호락 하지 않았습니다.
베녹번 성을 둘러싼 전투가 장기화되면서 스코틀랜드 군은 지쳐갔고, 이 기회에 반란 세력을 뿌리 뽑아야겠다고 생각한 잉글랜드 왕 에드워드 2세는 친히 병력을 거느리고 런던으로부터 북상해 옵니다.
스코틀랜드 군의 병력은 약 8천, 여기에 비해 잉글랜드 군은 증원군을 합하면 1만4천이 넘었습니다. 당시 전투의 주력이었던 중장 기사와 멀리서 화살을 날리는 궁수의 숫자도 잉글랜드 군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죠. 숫자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의 기병은 잉글랜드의 기병에 상대가 되지 않았고, 스코틀랜드의 궁수들은 잉글랜드의 궁수들에 비해 기량이 떨어졌습니다.
하지만 수년 동안의 전투 경험을 통해 부르스는 양군의 강점과 약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부르스는 잉글랜드 기병대의 공격을 상대적으로 약체인 기병으로 맞상대하는 대신 단단한 밀집보병 대형으로 막아내고, 온전히 보존해둔 기병대는 잉글랜드의 궁수들을 공격하는 데 투입했습니다.
이처럼 스코틀랜드 군이 자신의 강점을 극대화 하고 약점을 최대한 보완한 전술을 펼친 반면, 전력상으로 우세했던 잉글랜드 군은 제각기 따로 놀다 무너져갔습니다. 전투 첫날 기병대의 단독 공격은 실패했고, 둘째 날에도 궁수들이 제대로 사격도 하기 전에 기병이 돌격하여 또 패배하면서 궁수들의 사격까지 방해해 버린 것이죠.
결국 6월 23~24일 이틀 간에 걸친 전투에서 패배한 에드워드 2세는 간신히 목숨만 부지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월레스가 처형당한 지 9년 만에 벌어진 베녹번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부르스는 스코틀랜드의 왕 로버트 1세로 즉위했습니다. 이후 1326년 벌어진 잉글랜드 2차 침공까지 격퇴한 후 1328년 스코틀랜드는 독립을 쟁취하게 됩니다.
'스코틀랜드의 꽃'은 2인조 포크 그룹 '더 코리스'의 멤버인 로이 윌리엄슨이 작사, 작곡한 곡으로 스코틀랜드 독립의 전환점이 된 베녹번 전투를 모티브로 삼고 있습니다. 1965년 발표된 이 곡은 대중가요로 엄청난 인기를 끌다가, 오늘날 스코틀랜드의 국가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1990년 이후 스코틀랜드 축구팀이나 럭비팀이 다른 나라와 경기를 벌일 때면, 언제나 이 곡이 국가로 연주되고 있는 것이죠.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본선에 나섰던 스코틀랜드 팀의 경기 때도 스코틀랜드의 꽃이 불렸습니다.
이 노래가 국가로 불릴 때는 3절로 구성된 원곡의 가사 중 2절을 빼고 1절과 3절만 부르는데요. 여기에는 베녹번의 승리로 독립을 쟁취했던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가 주축이 된 연합왕국에 합병된 사연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양국 왕실의 혼인관계로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켜 있었는데요, 1603년 잉글랜드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 제임스 6세(엘리자베스 1세의 7촌 조카뻘)가 잉글랜드 국왕 제임스 1세로 즉위하게 된 것이죠.
스코틀랜드 왕이 졸지에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두 나라가 연합국가가 되어버렸고, 1707년 연합법이 통과되어 양국 의회가 통합되면서 한 나라가 되어버린 겁니다. 피땀으로 쟁취했던 스코틀랜드의 독립이 이처럼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 것이죠.
이 노래의 2절은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로부터 당했던 핍박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1688년 명예혁명으로 스코틀랜드 혈통인 제임스 2세가 퇴위되고, 그 아들 제임스 3세와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가 복위를 요구하면서 자코바이트(Jacobite)들의 반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들은 통일된 군복대신 챙 없는 푸른 모자와 흰 꽃 모양의 리본장식을 달아 자신이 자코바이트 군임을 나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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