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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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당은 정조의 증조부인 숙종 때 장희빈의 몰락과 함께 재야로 밀려났다. 이를 계기로 남인당의 주요 거점인 경상도는, 채제공의 문집인 <번암집>에 언급된 것처럼 18세기 내내 찬밥 신세를 겪었다. 참고로, 채제공은 경상도 출신이 아니라 충청도 출신이다.
경상도 출신이자 정조 때 무관이었던 노상추가 일기장에 적었듯이, 조정의 인사 조처가 발표될 때마다 경상도 사람들은 "이번에는 혹시 우리 지역 사람이 들어갔을까?"라며 관심을 표하곤 했다. 그 정도로 18세기의 남인당과 경상도는 심한 차별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채제공은 정조가 왕이 되기 전인 영조 때부터 남인당을 복구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 일은 채제공과 남인당을 위해서일 뿐만 아니라 탕평 정치를 위해서도 긴요했다. 노론당을 견제할 만한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탕평 정치의 안정을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었다.
채제공이 남인당 결집을 위해 구사한 방식은 상당히 독특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그것은 '출판기념회 정치'와 비슷했다. 그는 재야세력이 된 남인당 인사들을 모아 시회(詩會)를 자주 열었다. 자작시 발표회를 통해 남인당을 결집하고, 탕평 정권의 우군 세력을 확충하고자 했던 것이다.
때에 따라 채제공은 꽃놀이와 병행해서 시회를 열었다. <번암집>에 따르면 1784년 봄에는 한양 인왕산 육각봉에 있는 어느 집에서, 정동과 서대문 사이에 있는 남인당 인사의 집에서, 한강 변에 있는 이씨라는 사람의 집에서, 또 지금의 성북동의 한 장소에서 봄 놀이와 꽃 구경을 겸한 시회를 개최했다.
채제공의 시화 모임... 겉은 봄놀이, 속은 정치 단결이런 행사는 겉으로 봐서는 꽃구경이나 시회에 불과했지만, 실상은 정치적 단결을 위한 모임이었다. 이런 남인당의 행보는 보수파인 노론당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정조가 즉위하기 전 채체공이 시회 개최 때문에 사헌부 관료의 탄핵을 받은 것은, 그만큼 이런 행사가 정치적으로 민감했기 때문이다.
물론 시회를 연 행위 자체가 탄핵의 명분이 되지는 않았다. 선비들의 나라에서 이런 문학 모임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었다. 시회에 제동을 걸기 위해서는 트집을 잡을 만한 뭔가가 필요했다. 영조 44년 1월 5일 자(양력 1768년 2월 22일 자) <영조실록>에 따르면, 채제공이 시회를 연 시점이 부친의 삼년상이 끝나지 않은 때였다는 것이 탄핵의 명분이었다.
이런 사례는 채제공이 삼년상 중에도 세력 확장을 위해 시회를 열었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에 따라서는 그의 정치적 열정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정도로 탕평 정치의 기반 조성을 위한 열정을 보였다.
물론 시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곧바로 관직을 받거나 정치적으로 출세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임금의 최측근인 채제공이 주관하는 시회가 열리는 것만으로도 남인당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힘이 되었을 것이다.
시회를 통해 채제공이 외친 선전 구호가 있다. 그것은 '우리는 하나'였다. 이는 남인당 내부의 분파 활동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인당 내부에는 청남당과 탁남당이라는 분파들이 있었다. 시회의 친목 활동을 통해 채제공은 두 당이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는 하나... 북인당까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