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들이 불쌍해" 그런 말 들을 때마다...

[임재춘의 농성일기 20] 유랑문화제

등록 2014.11.12 10:50수정 2014.11.12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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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2014년 11월 6일 임재춘의 농성일기 1 ⓒ 임재춘


2014년 11월 6일 임재춘의 농성일기 2 ⓒ 임재춘


2014년 11월 6일 임재춘의 농성일기 3 ⓒ 임재춘


2013년 2월 1일 새벽, 콜트-콜텍 해고자들은 용역깡패들에게 인천 갈산동 콜트악기 공장에서 쫓겨났고 그 앞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콜콜 촛불문화제'(기타를 쳐라, 공장을 돌려라! 콜트콜텍 투쟁승리 촛불문화제)를 시작하였다. 그러다 늦봄(2013년 5월 10일 인천 동암역 북광장)부터 '콜트기타 불매 유랑문화제'로 변경하여 문화제를 지속한 지 2년이 되어간다.


콜콜 촛불문화제의 시작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재미도 있고 계획도 알찬 프로그램도 많았다. 인천 갈산동 주민에게 콜트-콜텍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하였다.

연대하는 사람들과 콜트-콜텍 조합원들은 개인기 자랑도 많이 하였다. 나도 '시 읽어주는 남자 임재춘'이라는 프로그램으로 시인들과 무대에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러다보니 나도 모르게 시인과 대화도 많이 하였고, 성격과 마음가짐을 달리 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은 <오마이뉴스>에 못 쓰는 글이지만 농성일기를 쓰고 있다.

경봉이형(김경봉, 금속노조 콜텍지회 조합원)의 문화제 무대 데뷔도 콜콜 촛불문화제였다. 경봉이형은 '콜콜 살롱'(라디오 진행 형식을 따와 만든 프로그램)에서 많은 웃음을 주었고 문화제 진행을 배워서 지금은 본사 목요집회 고정 진행을 맡고 있다. 사람들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경봉이형의 간드러진 목소리와 웃음을 주는 멘트를 들었다.

'슈퍼스타 콜콜'에 출전한 파견미술가들은 웃음을 주는 장기자랑을 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다시 만난 그들의 공연 때문에 슬픔과 외로움을 함께했던 (콜트공장에서의) 기억을 떠올렸다. 노동가수들과 시인들과는 시와 노래로 만나기도 하였다. 참 재미있었다. 어떤 때는 시를 통해 선배들의 노동역사를 조금 더 알게도 되었다.

음악가들은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위하여 셀 수 없이 많이 참석하여 노래를 불러주었다. 시인들이 전해주는 시 이야기를 듣다보니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많은 노래들이 시에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았다.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이 그랬다.


천막 농성장에 오는 솔로 가수들은 개인의 특성이 톡톡 튀었고, 자기들만의 노래가 있었다. 그들의 노래와 기타 연주와 댄스 모두 그들에게 어울렸다. 콜밴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중가요를 이것저것 음도 무시하고 마음대로 불렀는데, 촛불문화제와 유랑문화제에서 만난 가수들은 저마다 자신이 만든 노래를 하는 것이 멋있어 보였다.

5월 23일 서울 인사동 북인사마당에서 한 유랑문화제. 임재춘 조합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한 유랑문화제다. ⓒ 최문선


천막을 떠나 4월부터 우리들의 상황을 더 널리 알리기 위해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콜트기타 불매 유랑문화제를 시작하였다. 시민들에게 선전물도 나누어주며 우리들의 상황과 콜트기타의 나쁜 점을 설명하였다.


유랑문화제를 하면서 대한민국은 문화생활도 지배받는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문화제를 하는데 왜 집회신고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왜 마음대로 놀지도 못하는지 이상했다. 시민들에게 선전물을 나누어주면 외면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럴 때마다 속상하다. 어렵게 집회신고를 했는데 공연할 때 사람들이 잘 안 모이면 힘들다.

'콜트기타 사지도 치지도 말자'는 콜트기타 불매 서명운동도 유랑문화제와 같이 진행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이 아니라고 자기 마음대로 말하기도 했다. "다른 일을 찾으면 되지 왜 저렇게 살아?", "몇 년씩이냐, 자식들이 불쌍해" 등….

"저런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시끄럽다"고도 한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가 왜 이렇게까지 하여야 하나 생각이 들 때도 있다. 정리해고자만의 투쟁이라는 게 마음이 아프다. 어떤 시민들은 좋은 이야기를 해주어 힘이 생기기도 한다. 공연을 보던 시민들 중에서 콜트 기타 회사의 횡포를 알고 있다고 말해줄 때 마음으로 감사하고 유랑문화제 하는 보람을 느낀다.

지금 생각해보니 관객들로 가득 찼던 마로니에 야외무대 공연(2014년 7월 4일)과 북인사 마당에서 공연했을 때(2014년 5월 23일)의 기억이 많이 난다.

그러나 매회 유랑문화제가 끝난 후에 느껴지는 허전함은 어찌할까? 공연을 보는 사람이 많든 적든 '과연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문화제를 한다고 사람들이 얼마나 우리의 처지를 알아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들의 이 싸움이 우리들만의 싸움으로 끝나는 것은 아닐까? 세상이 정말 나아질까…. 의심스럽다.

처음부터 유랑문화제를 계획하고 연출해온 문선, 윤승 그리고 올해 같이 한 명타, 권형에게, 그리고 콜밴의 연주를 도와주는 '푼돈들'과 '만밴'(만석동밴드)에게 이번 글을 통하여 감사를 전한다.

2014년 11월 6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해고자도 아닌 나'... 왜 그곳에서 연대하는가

올해 유랑문화제 웹자보 일부. ⓒ 이권형(유랑문화제 기획팀)


나에게 올해의 유랑문화제는 작년의 유랑문화제보다 허전하고, 촛불문화제보다 덜 보람되었다.

'콜트콜텍 투쟁 승리 촛불문화제'(이하 촛불문화제, 2013년 2~4월)를 할 때 시를 읽기 위해 무대에 오르는 임재춘 조합원은 안쓰러우리만치 부들부들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그 순간에 한없이 기뻐했고, 자부심을 느끼는 듯했다. 그때는 김경봉 조합원의 사회자 멘트를 한 줄 한 줄 함께 소리 내어 읽으며 써 내려갔다. 점점 천막농성장으로 오는 사람들이 줄어가니 기운이 빠지기도 했지만, 농성자들과 프로그램 하나를 준비하는 과정은 마치 거대한 바위를 들어 올리는듯 위대했고 즐거운 일이었다.

폐공장에서 하는 문화제와 천막농성장에서 하는 문화제가 달랐듯, 농성장을 떠난 유랑문화제는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출연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그 이전과는 다른 것이었다. 준비하는 노력에 비해 공연의 성공 여부는 우연성이나 장소의 적절성 등에 더 많이 좌우되었다. 가끔은 기후 변화에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유랑문화제는 성취감보단 준비과정에서 느끼는 고달픔이 컸다. 농성장에서 만나는 관객에게는 긴 설명이 필요 없었고, 관객의 수와는 상관없이 사람들 사이에 진한 공감대가 있었다. 그래서 시도는 새롭고, 과감했다. 그러나 유랑문화제로 거리에 나선 콜트-콜텍 해고자들은 불특정 다수가 오고가는 거리에서 낯선 이방인이 되어야 했다. 

정치성이 강하다는 이유로, 유랑문화제로 사용할 수 있는 장소는 점점 줄어갔다. 기껏 장소 사용 승인 절차를 마치고 공연을 하러 갔는데, 공연장소를 먼저 차지하고 있는 종교단체와 막막한 말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때론 상인들과 고성을 주고받은 후 눈물 뚝뚝 흘리며 공연을 시작해야 할 때도 있었다.

작년과 올해 유랑문화제를 통해 느끼는 거리의 온도 차이 또한 컸다. 배우 김보성의 '으리'가 유행을 타던 올해, 그 '으리 열풍'에 담긴 냉소와 보신주의는 차가운 공기가 되어 거리를 채우고 있다고 느껴졌다. 거리의 시민들은 작년보다 더 무심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유랑문화제의 동력 자체를 흔들지는 않았다. "그건 사장님 생각이고요, 저희 직원들은 오늘 정말 음악 감상 잘 했어요", "올해 또 하네요. 어이쿠, 아직 해결 안 됐어요? 그 회사 안 되겠네"라는 목소리가 더 생생했기 때문이다.

유랑문화제 기획팀의 치명타 작가가, 상덕 작가가 만든 조형물을 메고 시민들에게 유랑문화제를 알리고 있다. ⓒ 이병관


그렇게 고생하며 돌아다니고 알려왔는데, 결국 콜텍 해고자들이 법정 소송에서 모두 패소했기 때문에 이 허전함이 남는 걸까. 올해 10회차를 진행하는 동안 유랑문화제 기획팀으로 함께 일한 윤승, 권형, 치명타에게 나는 묻지 못했다. 그들 역시 나처럼 해고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그 일들은 어떤 의미였냐고, 어떤 것들이 가장 힘들었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콜트콜텍 해고자들 역시 아직까지 누구하나 내게 묻지 않았다. 다만 다음 공연의 진행상황을 점검할 뿐이었다. 

최근에서야 어떤 사람에게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신은 왜 그곳에서 연대하는가? 이해가 안 된다.' 사실 나에게, 그런 류의 질문에 정해진 답은 없었다. 어느 날 시작해서 이제까지 습관처럼 해온 일이었다. 대단한 의지도 없었고, 정치적 이해관계도 없었다. 사회적 인정욕을 채워주는 게 있었다고 답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질문한 사람에게나 나 스스로에게나 부족한 답들만이 떠올랐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질문을 받은 이후 이전까지 유랑문화제를 생각하면 차오르던 답답함이 완화되는 걸 느꼈다. 그 질문이 '해고자도 아닌 나'를, '해고자와 함께하는 나'로 다시 전환시키는 것 같았다. 내가 그 질문의 답을 생각하는 과정에서 내 존재가 환기되었다. 이왕이면 콜트-콜텍 농성자들이 나를 비롯한 유랑문화제 기획팀에게 물어주었다면 더 좋았을 질문. 유랑문화제의 겉과 형식에 주목했던 한 해. 그러나 그것을 만들어왔던 사람들에겐 질문이 없던 한 해.

해고자와 나, 나와 유랑문화제는 그렇게 촛불문화제 때처럼 열렬하게 서로를 들여다보지 못하고 의무감에, 막연한 의지에 제 마음을 묶어두었던 것 같다. 10월 24일 대한문에서 올해의 마지막 유랑문화제를 끝내고 내게 남은 유랑문화제에 대한 소감은 이것이다.

'일은 많았으나, 서로를 귀히 여기지 못해 그 노고가 흩어지고 허전하다.'

겨울 앞에서 유랑문화제는 멈춰 있지만, 또 다시 봄이 와 콜트기타 불매 유랑문화제가 시작된다면 그땐 기획이나 예술로 품앗이하는 정성이 조금은 더 세심하게 돌봐졌으면 좋겠다.

유랑문화제 일정이 홍보되면, 부대 행사 진행을 도우러 오는 사람들. ⓒ 최문선


덧붙이는 글 '콜트기타불매유랑문화제' 페이스북 페이지
#콜트콜텍 #정리해고 #위장폐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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