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고인들 어디 믿는 구석 있어요?"... 그저 연극이길

[임재춘의 농성일기 19] 연극이 끝나고 난 뒤

등록 2014.10.18 09:23수정 2014.10.18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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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기타 제조업체 콜트-콜텍의 노동자들은 정리해고를 당했습니다. 그 뒤로 계속된 투쟁과 농성. 지금도 그들은 인천에 있는 옛 콜트악기 부평공장 앞에서 농성을 벌이고 있습니다. 해고자 임재춘씨는 오늘도 그곳을 지키며 굵고 거친 손으로 펜을 꾹꾹 눌러 글을 씁니다. 임재춘씨가 농성장 촛불문화제에서 낭독한 '농성일기'를 연출자 최문선씨의 해설과 함께 독자 여러분들께 전합니다. [편집자말]



7월 25일부터 27일까지는 '문화역서울284RTO'(옛 서울역)에서 9월 18일부터 21일까지는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소극장'에서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란 제목으로 '카페 그'와 연극을 하였다.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에 나오는 시골 사람은 과연 소설 속에만 존재할까? <법 앞에서>는 콜텍 8년간 법 투쟁과 '카페 그'의 상가임대차 보호법 개정 싸움의 내용으로 각색되어 '진동젤리'가 연출한 연극이다.


사실 우리 노동자, 상인들은 평소에 헌법이나 근로기준법, 상가임대차 보호법이 뭔지 잘 모른다. 상인과 노동자로 살다보면 하루하루 노동과 장사를 해야 먹고살기 때문에 법조차 생각할 시간이 없다. 법을 생각하면 당장 두렵고, 떨리고 해서 죄짓고는 못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나의 경우 경찰서 갈 일 없이 순진하게 노동하면서 생활을 하였다. (해고 후) 투쟁하면서 경찰서 가서 조사도 처음 받았고, 구치소 생활도 처음 하였다. 그때 무슨 법이 그리 많은지 놀라웠다. 경찰 조사 받을 때는 모든 게 낯설고 시간이 많이 걸려 괴로움, 짜증 그 자체였다.

연극에서는 '법'의 존재 가치를 설명하려 하였다. 법정에 선 노동자(콜텍 해고자)가 떨리는 마음으로 원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하였는데, 법이 정한 표현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노동자들은 법원의 통제 때문에 변론하던 말을 멈추어야 한다. 연극에서는 그 상황을 "삐-" 하는 소리로 표현했다.

사람은 누구나 재판장의 판사 앞에 가면 죄지은 것도 없는데 주눅이 들어 할 이야기도 못하고 내려온다. "삐-" 소리는 판사의 호통이고, 법정의 재판시간이다. 힘 없는 해고자들과 상인들은 그 소리를 무시할 수 없다. 진동젤리 연출가들이 "삐-" 소리를 내면 해고자들이 등 뒤의 화면을 쳐다봐야 하는데, 나는 꼭 그 순간에 다음 대사를 잊어버린다.

'카페 그'는 어떠한가? 10년 이상 장사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건물주의 구두 약속을 받고 가게를 오픈했다. 가게 문 연 지 8개월 만에 건물주는 재건축할 테니 나가라고 명도소송을 걸어왔다. 난생 처음 재판장에 갔더니 상인의 억울함을 얘기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고 한다. 판사가 대놓고 무시했다고 한다.


"어디 믿는 구석 있어요? 법이 이런데 피고들 뭘 믿고 고집을 피워요? 피고들 명도소송 기간 끌어 장사 좀 더 하려는 전형적인 장사치들이군요. 그런 사람들 많이 봤어요. 피고들 얘기는 믿을 수 없습니다."

같이 연극한 '카페 그' 이선민과 지원의 연극 대본에서 나온 내용이다. 서민과 상인들은 재판하기를 싫어한다. 법 절차도 잘 모르고 그렇다고 변호사 살 돈도 없어서이다. 서민과 상인들만 피해보고 있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이번 연극에서는 나의 모자란 연기가 어설펐지만 3막 기타 만드는 장면에서는 마음이 뭉클하였다는 관객의 평을 많이 들었다. '카페 그'의 선민과 지원은 목소리 톤이 안정적이고, 표현이 자연스러워 우리보다 훨씬 잘한다.

<법 앞에서> 대본에 시골 사람이 법 안으로 들여보내달라고 하는 대목이 있다. 시골 사람을 문지기가 막는다. 시골 사람은 법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서 문지기에게 아부 선물까지 하며 애원하지만 나이가 들어 죽을 때까지 법 안으로 못 들어간다. 현실에서도 법은 노동자, 상인의 출입을 막는다. 법은 애초 평등하지 않다. 현 사회에서 대한민국 법은 판결이라는 문지기를 두고 어려운 말로 판사 마음대로 법 조항을 다르게 해석한다.

내가 예전에 알던 법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였다. 그러나 요즘의 법은 돈과 권력이다. 콜텍 박영호(사장)에게는 필요한 법이지만 대전 콜텍 노동자들에게는 필요 없는 법이다. 왜냐하면 근로기준법이 노동자를 위한 법이지만 아무것도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영호에게 필요한 법은 모두 지켜졌다.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 법은 대기업 경영자들에게 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이다. 그래서 법에는 원칙이 없다고 생각한다. 법은 국회에서 만들지만 그렇다고 무슨 소용이 있을까? 재판부가 자기 멋대로 해석하면 그만인데….

2014년 10월 6일 콜텍 해고자 임재춘

'산들바람 장아찌' 손에 든 배우 보면서 내내 울었다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를 원작으로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까페 '그' 임차상인들의 소송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 혜화동1번지 소극장. 연출 권은영. 2014년 9월 18일.
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를 원작으로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까페 '그' 임차상인들의 소송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 혜화동1번지 소극장. 연출 권은영. 2014년 9월 18일.박승화 사진작가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이 법에 대한 환상을 깼으면 좋겠어."

금속노조 콜텍지회 이인근 지회장은 <법 앞에서>에 관한 후일담 첫 마디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콜텍과 콜트 해고자들은 지난 8년 동안 법과 싸웠다. 법의 공정성에 기대어 해고의 부당함을 묻고 싶었다. 법의 객관성으로 회사의 해고가 경영상 이유가 아니라 노조 결성을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음으로 밝혀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결과, 복직이라는 진리가 이루어지길 원했다. 그러나 판결은 법이 명시하는 모호한 기호들을 이용해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법은 그렇게 해석의 대상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걸 콜텍 해고자들도 긴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법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잘못된 판결은 일부 판사의 문제라고 인식하거나 운이 나빴다고 말한다. 때론 그 해고자들의 저항이 변변치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하여 법적 싸움에서 끝내 져버린 해고자들이 "패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능력이 없거나 욕심이 과해 노조를 만들다 잘린 사람들,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떠돌며 의미 없는 싸움을 저리도 길게 한 사람들. 이러한 낙인에 또 하나의 낙인이 보태어진 셈이다. 그러고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연극이 애초 말하려 했던 것처럼 콜텍 해고자들이나 '카페 그'의 지원과 선민은 연극 속 시골 사람과는 달랐다.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설 속 시골 사람처럼 자신의 소중한 걸 다 내주고도 끝내 생을 포기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법 밖에서 또 다른 법을 만들어갔다. 그것은 삶의 이치라는 무형의, 구전의, 보다 더 오래된 상식이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라는 그 흔한 말들에 담긴, 이치다.

나는 임재춘 조합원이 시골 사람으로 등장할 때, 그가 들고 있는 그의 귀중한 '산들바람 장아찌'(콜트-콜텍 해고자들이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만들어 판 장아찌)를 보면서 내내 울었다. 전에 이들이 공연한 연극 <구일만 햄릿>을 거쳐 <법 앞에서>에 이르러서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해고자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비련의 소녀'로 변신한 아저씨... 관객들은 "하악~")

 연극 <법 앞에서> 포스터
연극 <법 앞에서> 포스터진동젤리

작년 이맘 때 <구일만 햄릿>을 성황리에 끝내고 이후 대법원 판결에서도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기대하며 들뜨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또 법으로는 증명되지 않았던 그들의 8년이 법 밖에서 다르게 증명되고 있으니 천만다행이라 울었다. 또 누군가도 그랬을 것이다.

'진동젤리'의 연출자 권은영은 <구일만 햄릿> 때보다 "아저씨"들이 무대를 즐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구일만 햄릿>의 뿌리가 된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어본 적 없고, 카프카의 <법 앞에서>는 더더욱 들어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자신의 대본 분량을 챙기고, 애드리브의 대가로 거듭났다.

물론 실수는 여전했다. 혜화동1번지 첫 공연 때 김경봉 조합원은 대사를 통째로 날려버리고 5~6분 정도 가만히 서 있었다. 김경봉 조합원과 임재춘 조합원 사이에서는 관객은 모르는 묘한 대사 경쟁이 무대에서 펼쳐지기도 했다. 매회 연극이 끝난 직후 임재춘 조합원은 "경봉 형 때문에 내 대사 또 잘렸어"라는 푸념을 했다. 재판 장면에서 "삐-" 소리가 나면 배우들이 대사를 멈춰야 하기에, 앞 배우의 대사가 늘어지면 뒷배우의 대사는 짧아지는 독특한 구조 때문이다. 

콜텍 해고자들이 무대에 오를 때마다 유연함과 능동성이 커지는 것은 기쁜 일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슬픈 일이기도 하다. '카페 그'의 지원은 콜텍 해고자들의 여유로움과 능청이 놀랍고 존경스럽다는 말을 한 적 있다. 그 능청 또한 생의 본능에서 나온 숙련된 투사의 자기 연출이고, 자기 암시라는 생각이 들 때면 자꾸 울렁거려오는 가슴 속을 주체할 수 없다. 

무대에 오른 그들을 향한 박수 소리는 한층 커졌지만, 법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빨리도 잊힌다. 지금도 농성장을 유지하고 있는 그들을 향해, 명분 없는 싸움이니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냐는 목소리가 간혹 들리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법 안에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목소리다.
#콜트콜텍 #법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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