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소설 <법 앞에서>를 원작으로 콜트콜텍 노동자들과 까페 '그' 임차상인들의 소송과정을 그린 다큐멘터리 연극 <법 앞에서>. 혜화동1번지 소극장. 연출 권은영. 2014년 9월 18일.
박승화 사진작가
"이 연극을 본 관객들이 법에 대한 환상을 깼으면 좋겠어."금속노조 콜텍지회 이인근 지회장은 <법 앞에서>에 관한 후일담 첫 마디로 이런 이야기를 했다. 콜텍과 콜트 해고자들은 지난 8년 동안 법과 싸웠다. 법의 공정성에 기대어 해고의 부당함을 묻고 싶었다. 법의 객관성으로 회사의 해고가 경영상 이유가 아니라 노조 결성을 거부한 데서 비롯되었음으로 밝혀주길 바랐다. 그리고 그 결과, 복직이라는 진리가 이루어지길 원했다. 그러나 판결은 법이 명시하는 모호한 기호들을 이용해 정리해고는 정당하다는 해석을 내렸다.
법은 그렇게 해석의 대상이지 진리가 아니라는 걸 콜텍 해고자들도 긴 시간이 지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법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잘못된 판결은 일부 판사의 문제라고 인식하거나 운이 나빴다고 말한다. 때론 그 해고자들의 저항이 변변치 못했던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한다. 그리하여 법적 싸움에서 끝내 져버린 해고자들이 "패자"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능력이 없거나 욕심이 과해 노조를 만들다 잘린 사람들, 가족을 지키지 못하고 떠돌며 의미 없는 싸움을 저리도 길게 한 사람들. 이러한 낙인에 또 하나의 낙인이 보태어진 셈이다. 그러고도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사람들.
그러나 연극이 애초 말하려 했던 것처럼 콜텍 해고자들이나 '카페 그'의 지원과 선민은 연극 속 시골 사람과는 달랐다. 법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소설 속 시골 사람처럼 자신의 소중한 걸 다 내주고도 끝내 생을 포기하는 존재가 되지는 않았다. 법 밖에서 또 다른 법을 만들어갔다. 그것은 삶의 이치라는 무형의, 구전의, 보다 더 오래된 상식이다. "식사는 하셨어요?", "아니 어떻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 있어?"라는 그 흔한 말들에 담긴, 이치다.
나는 임재춘 조합원이 시골 사람으로 등장할 때, 그가 들고 있는 그의 귀중한 '산들바람 장아찌'(콜트-콜텍 해고자들이 투쟁기금 마련을 위해 만들어 판 장아찌)를 보면서 내내 울었다. 전에 이들이 공연한 연극 <구일만 햄릿>을 거쳐 <법 앞에서>에 이르러서는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해고자를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관련기사 :
'비련의 소녀'로 변신한 아저씨... 관객들은 "하악~")